헤즈볼라를 통해서 보는 모자이크 국가, 레바논

박찬기 | 고려대 정경대 강사,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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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초순에는 레바논이 준 내전상태로 진입하면서 또다시 전 세계적인 이목을 집중시켰다. 1975년부터 1990년까지의 장기간의 내전, 2005년 하리리(Rafik Hariri) 전 총리의 암살, 2006년의 7-8월의 이스라엘과 헤즈볼라의 전쟁 등으로 끊임없이 세계의 주목을 받아왔던 레바논이 다시 내전의 길목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빈번한 정치적인 불안으로 인하여 우리가 레바논의 현실을 간과할 수 있으나 현재는 우리의 동명부대가 남부레바논에 파견되어 있기에 누구보다도 관심을 가져야할 국가이다. 2006년의 전쟁도 그러하지만 이번의 무력충돌도 ‘헤즈볼라’ 라는 무력단체가 그 주인공이다. 지난 5월 7일에 일어난 무력충돌은 레바논정부가 헤즈볼라의 전쟁통신시설, 즉 헤즈볼라가 베이루트공항에 임의로 설치한 감시카메라와 자체 전화시스템을 폐쇄하고 그 담당자를 해고하면서 발단이 되었다. 헤즈볼라의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Hasan Nasrallah)가 이러한 정부의 조치를 이들에 대한 전쟁선포로 간주하면서 헤즈볼라대원과 여당 지지자들 간에 무력충돌이 시작된 것이다. 100여명 가량의 희생자를 냈으나 다행히 지난 5월 20일 카타르의 중재(도하협상)로 사태가 수습되었다. 그 결과 그간 공석이던 대통령선출과 연합내각구성 및 내년의 의회선거에 대한 선거법 재정비 등을 골자로 하는 내용의 협상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타협의 결과 5월 25일 레반논군 사령관 미첼 술레이만(Michel Suleiman)이 제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시니오라(Fouad Siniora)수상이 유임되면서 연립내각을 구성하게 되었다. 도하협정에 의하면 현 야당세력을 구성하는 헤즈볼라, 아말 및 자유애국운동당(Free Patriotic Movement)이 내각의 27석 중 11석을 차지하게 되어 있다. 즉 야당이 중요한 내각의 결정을 거부할 수 있는 1/3이상의 의석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이번의 도하협정에서 가장 실리를 챙긴 단체가 야당세력, 특히 헤즈볼라라고 하고 있다. 그 이유는 헤즈볼라가 내각의 2/3이상의 찬성에 의하여 결정되는 국가중대사에 거부권행사를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레바논 내전종결협정인 타이프협정(Taif Agreement)에 준하면 레바논의 모든 무장단체들이 무장해제를 하게 되어 있으나 유일하게 헤즈볼라만 이에 반대하고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위협이 상존하는 한 무장을 유지해야 된다고 주장해왔으며 여당이 임의로 이들의 무장해제를 결정할까봐 노심초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국가 안에 국군이나 경찰 외에 또 다른 무장단체가 존재하는 것이며 레바논정부로 볼 때는 항상 위협적인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2006년의 헤즈볼라와 이스라엘의 전쟁과 이번의 사태에서도 증명이 되었다. 이러한 국가안의 국가로서 존재하는 헤즈볼라를 우리의 잣대로는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레바논의 근본적인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국가의 형성과정과 헤즈볼라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이 필요하다.

레바논 국가의 태생적인 문제
1943년 프랑스로부터 독립당시 레바논은 자체의 특수한 사회적 환경을 감안하여 종파 간의 정치권력을 분배하는 제도를 창안했다. 이러한 국민협약에 의하여 모든 권력을 종파간의 인구수에 따라 분배하게 되었다. 대통령은 기독교도인 마론파, 수상은 순니파, 국회의장은 쉬아파에서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권력의 분배제도가 조화를 이루어서 1950년과 1960년대에는 레바논이 ‘중동의 스위스’ 또는 수도인 베이루트가 ‘중동의 파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안정과 번영을 누리는 국가로 성장했다.
그러나 바로 아래지역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분쟁으로 인하여 레바논 남부지역이 항상 불안한 상황에 있었다. 특히 1967년 6월 전쟁에서 아랍연합군이 이스라엘에 다시 참패하면서 레바논거주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그들의 국토를 회복하기 위하여서는 본인들이 직접 투쟁에 앞장서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곧 자체 무장을 하게 되고 본격적인 대 이스라엘 투쟁에 돌입하면서 레바논정부와의 마찰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더욱더 악화시킨 계기가 요르단에서 유입된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이다. 1970년 9월 요르단의 후세인국왕은 자국에 주둔하는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이 요르단 안에서 또 다른 국가로 행세를 하자 국가안위를 위하여 대대적인 팔레스타인게릴라 소탕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 결과 약 3,500명의 팔레스타인 게릴라대원들이 전사하고 패잔병 수천 명이 레바논으로 피신하였다. 이들이 레바논거주 팔레스타인 민병대와 합류하면서 상황은 급변하게 되었다. 팔레스타인 게릴라의 영향력 증가를 염려한 기독교의 팔랑게(Phalange)민병대가 1975년 4월 이들의 기지를 습격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1990년까지 15년간의 내전은 17만 명의 인명손실과 함께 경제기반을 파괴했으며, 기존의 모자이크사회를 붕괴시켰다.

마이클 술래이만
  • 레바논의 새 대통령으로 선출된 마이클 술래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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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즈볼라의 탄생
내전이 시작되자 이란 출신인 레바논 쉬아민중운동가인 무사 알 사드르(Musa al -Sadr)는 쉬아인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그해 7월 쉬아민병대, 아말(AMAL)을 결성하게 되었다. 초기 아말은 쉬아내부의 여러 단체의 느슨한 연대에 불과했으며, 더 많은 쉬아인들이 다른 민병대로 참여하고 있었다. 무사 본인도 레바논에서 어떤 혁명적인 변화를 요구하기보다는 기존의 정치체제의 개혁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그러나 1978~79년 기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쉬아의 급진적인 정치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 첫째가 1978년의 이스라엘의 레바논침공이며, 둘째가 같은 해에 발생한 무사의 행방불명사건이며, 마지막이 1979년의 이란의 팔레비정권의 몰락과 호메이니의 등장이다.
특히 1978년의 이스라엘의 레바논침공 시 아말은 레바논남부에서 팔레스타인게릴라활동에 반기를 들면서 이스라엘군에 협조하면서 조직 내외에서 그 정통성에 대하여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여건 하에서 1982년의 제2차 이스라엘의 레바논침공은 레바논무슬림에게 완전한 패배감을 심어주었으며, 특히 쉬아 과격세력이 이란의 호메이니정권과 결탁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스라엘군의 레바논침공 작전이 한창인 1982년 8월 테헤란에서 개최된 제1회 이슬람운동협의회(Islamic Movement Conference)에서 이란의 지도자 호메이니는 레바논성직자와 만난자리에서 이들에게 귀국하여 대 이스라엘항쟁을 적극 추진하고 사원을 지하드의 활동근거지로 이용할 것을 지시했다. 귀국 후 이들은 베카계곡에서 이스라엘과 미국 및 레바논 내의 이들 지지자에 대한 무력투쟁을 선언하였다. 이 자리에는 수백명의 쉬아 성직자와 과격주의자들이 모였는데 이들이 주동이 되어 ‘헤즈볼라(Party of God)’라는 과격 쉬아 무장단체를 결성하게 되었다. 그 후 이들은 이란과 시리아의 적극적인 지지 하에 반이스라엘 반서구 테러활동을 자행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83년 레바논주재 미국대사관과 해병대숙소 폭발사건(각각 63명, 243명 사망), 그 후 계속적인 인질사건과 TWA항공기납치사건 등은 전 세계적인 뉴스가 되었다. 그러나 1985년 헤즈볼라가 자체의 정체를 밝히는 공개서한(Open Letter)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이 조직에 대하여 별로 알려진 것이 없었다. 이후 헤즈볼라는 내전기간에 레바논에서 대 이스라엘저항단체의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매김을 했으며 2000년 남부레바논에서 이스라엘군이 철거하면서 종파를 초월하여 이슬람세계에서 성전의 대표적인 단체로 거론되었다.
뿐만 아니라 헤즈볼라는 내전종식 후 1992년의 총선에 참여하면서 제도권정치에 진입하게 되었다. 첫 선거에서 헤즈볼라는 쉬아파에 할당된 27석 중 8석을 차지하고 순니와 기독교에서 각각 동조자 2석, 총 4석을 차지하면서 의회 내에서 영향력 있는 정당으로 자리 잡았다.
2000년 선거에서는 쉬아 라이벌인 아말보다 3석이 많은 9석을 차지했다. 그 원인은 2000년 이스라엘군이 남부 레바논에서 철수하면서 헤즈볼라의 인기도가 상승했으며 그해 6월 시리아의 아사드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헤즈볼라는 외부의 간섭 없이 실용주의노선에 따라 더 자유롭게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백향목 혁명과 헤즈볼라-이스라엘전쟁
레바논은 내전종식 후 국가통합과 복구사업을 적극추진하면서 평화와 안정이 정착되는 것 같았으나 2005년 2월 전 수상 하리리의 암살이후 또다시 불안한 정치현상이 재현되었다. 하리리 암살 한 달 후인 3월 14일 베이루트에서는 백만이 넘는 시민이 시위에 가담하면서 그의 암살에 대한 진상파악을 촉구했고 나아가 시리아군의 철수와 레바논주권회복을 요구하게 되었다. 또한 4월 UN안보리에서는 하리리 암살에 대한 조사를 촉구하는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와 같이 국내외적인 압력이 높아가자 시리아군은 1976년부터 주둔해온 레바논에서 같은 달 27일 철수를 단행했다. 이 사건을 “백향목(레바논을 상징하는 나무)혁명”이라 부르며 레바논의 민주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또한 이 시위를 주관한 주동자들의 모임인 “3·14그룹”이 레바논의 큰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도 결국 현실로 연결되지 못하고 2006년 7월에는 이스라엘과 헤즈볼라간의 전쟁이 한 달 이상 계속되었다.
내전종식 후 헤즈볼라는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레바논남부에서 계속적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있었다. 더욱이 이란과 시리아로부터 무기와 자금을 계속적으로 지원받아왔으며 남부지역에서는 그들의 기지를 요새화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헤즈볼라의 세력이 증가하자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이들의 세력이 확장되기 전에 소탕작전을 벌였다. 명목은 헤즈볼라에 인질로 잡혀있는 2명의 이스라엘병사를 구하는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복잡한 변수들이 연관되어 있다. 특히 미국은 이스라엘의 공격을 묵시하면서 국제테러조직으로 지명되어 있는 헤즈볼라가 파괴되길 원했고 이를 통해 레바논에서의 이란의 영향력을 일축하기 위한 저의도 있었다. 아랍 순니파 국가들 역시 헤즈볼라와 이란의 영향력이 레바논에서 감소하기를 원했기에 전쟁초기에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한 달이 넘게 이스라엘이 공격을 계속했지만 헤즈볼라는 계속적으로 로케트포(Katyusha rockets)로 북부이스라엘을 공격했고 쌍방에 수많은 민간인 사상이 이어졌다. 뒤늦게 국제적인 압력에 의해 전쟁은 종식 됐는데 승자는 헤즈볼라였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공격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과시하면서 레바논 국내뿐만 아니라 전 이슬람세계에서 그들의 위상을 높였으며 이들의 지도자인 하산 나스랄라는 영웅이 되었다. 반면 이스라엘과 미국의 위상이 하락하고 이란의 영향력이 더욱더 상승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런 여건을 활용하여 헤즈볼라는 국내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더욱더 증가시키고 친 서방인 순니파 출신인 파우드 시니오라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 2006년 11월 내각에서 사퇴하고 2007년 1월 23일에는 총파업을 선포했다. 이러한 정치적인 불안이 지난 5월 초까지 계속 이어져 왔다. 그 주원인은 헤즈볼라가 여당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무장해제를 당하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이를 방지하기위해서는 내각에 최소한 1/3이상 이들의 지지자를 확보해야 하는데 지난 도하협정에서 헤즈볼라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했다.

결론 및 전망
현재 헤즈볼라는 레바논의 제도권정치에 진입했지만 또 다른 구조적 문제점이 주어지면 다시 과거와 같은 무력투쟁단체로 회귀할 수 있다. 쉬아가 레바논 최대의 인구집단(약 33%)이지만 의석은 오직 27석이 배분되어 있고 기독교 마론파는 인구의 20%정도이지만 34석을 차지하고 있다. 순니 또한 약 20%의 인구지만 27석을 차지하고 있고 총리직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쉬아의 정치적 경제적 소외감이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초기 쉬아 민중운동의 불씨가 그대로 잔존하는 것이다.
지난 4월 13일은 레바논내전(1975-90)이 시작 된지 33년이 되는 날이었다. 15년이라는 장기 내전으로 과거 레바논을 ‘중동의 스위스’ 베이루트를 ‘중동의 파리’ 라고 하던 비유가 무색할 정도로 레바논은 대대적인 파괴와 혼란을 겪었다. 그러면 내전 시작 33년이 지난 현재 레바논은 어떤 상황에 있는가?
대답은 간단하고 비관적이다. 지난 5월 초에 본바와 같이 그때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레바논은 건국초기부터 종파간의 인구비례에 의하여 권력을 분산한 유일한 국가이며, 국민들도 그들의 소속종파에 따라 정치, 경제 및 사회적 생활을 영위해왔다. 현재 레바논의 정치국면이 이러한 상황과 비슷한 위치에 처해있다. 다만 지난 5월 20일에 체결된 도하협정이 무사히 실행되어 레바논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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