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자주 찾을 만한 나라가 되었을 때
‘악의 축’과의 작은 타협
남북한 정상들은 이번 달에 북한의 수도 평양에서 제2차 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양국간의 관계 강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이번 회담은 옛 ‘깡패 국가’와 미국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될 전망이다. 애초 8월로 예정되었던 정상회담은 북한을 덮친 홍수 때문에 연기되었는데, 애초 약속보다 6년이 더 걸려야했다.
남북한 정상은 2000년 6월 역사상 처음으로 평양에서 서로 만났다. 조선 인민민주주의공화국 지도자 김정일은 답례로 서울을 방문하게 되어있었으나, 이번에 또 다시 그가 남한 지도자를 영접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노무현 대통령과 그의 전임자 김대중 대통령은 소위 ‘햇볕정책’이라 불리는 화해정책을 통해 수십 년간의 적대 관계를 종식했다. 세계 10위의 경제 강대국인 남한은 북한보다 여러 면에서 현저히 앞서 있다. 남한 입장에서는 김정일로 하여금 일정을 잡도록 하는 것보다 참을성 있게 개방정책을 추구하는 것이 덜 비싸게 먹힌다. 게다가 초대에 응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은 그로부터 정치적 이득을 얻어내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새로운 대통령으로 출마할 수 없기에 인기가 떨어지고 있는 중인 이 남한 지도자는 12월에 있을 대선에서 자신의 후계자가 당선될 기회를 확대시키려 애쓰고 있음이 틀림없다.
남한 정치를 조종할 수 있다고 오랫동안 생각해온 북한은 겉보기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1998년 화해정책이 가동되자 북한에 대한 남한 사람들의 인식이 요동쳤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을 ‘사디스트’로 규정하는 프로퍼갠더에 익숙한 남한 사람들은 실수로 잃어버린, 약간은 엉뚱한 사촌 정도로 북한사람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정상회담은 이 놀라운 인식 변화의 정점을 보여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반도가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동북아시아 경제정책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지하며, 후속세대에 ‘동북아 경제시대’를 물려주기를 원하고 있다.
정상회담은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김정일 지도자 사이의 예기치 않은 화해 무드 속에서 열린다. 이러한 화해 분위기는 아직도 그 계기가 잘 알려지지 않은, 2007년 2월 13일 이루어진 비핵화에 대한 합의를 통해 감지되고 있다. 2006년 7월 북한은 7발의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미국의 국경일을 ‘경축’했다. 그중에는 장거리 미사일인 대포동 2호와 일부 중거리 미사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 10월 9일 북한 지도자들은 최초의 핵실험을 강행했고, 그에 따라 유엔은 제재 조치를 취했다. 역사상 최초로 러시아와 중국이 이러한 제재를 지지했다.1)
모호한 외교적 전환
부시 대통령은 “나쁜 행동거지에 대해서는 그 어떤 보상도 없다”고 항상 강조했다. 그는 북한과의 모든 형태의 직접 협상을 조직적으로 거부했다. “우리는 악과 협상하지 않는 대신 그것을 물리칠 것입니다”라고 2004년 리처드 체니 부통령이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2월의 합의는 미국의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와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 베이징과 베를린에서 직접 접촉한 후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2년 전부터 북한의 핵 프로그램 문제를 놓고 남북한, 중국, 미국, 일본 및 러시아가 함께 모이는 6자 회담에서 소개된 것이다.
얻어낸 결과는 획기적인 것이다. 북한 플루토늄 원자로를 봉인한 후 폐쇄할 것,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취한 제재와 금수 조치를 점진적으로 제거할 것, 미 국무부가 작성한 ‘깡패 국가’ 리스트에서 북한을 삭제할 것, 국제원자력기구 조사관들의 북한 재입국, 양국간의 관계 정상화를 도모하고 한국전쟁을 종식시키는 평화조약 체결의 모색 등이 그 내용이었다.
하지만 부시가 요구사항들을 주문하기 전에 이 모든 조치가 이미 진행 중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빌 클린턴 행정부 역시 북한의 미사일 프로그램을 중지시키기 위해 비슷한 계획을 짠 바 있었다. 합의가 2000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부시는 그 합의가 와해되도록 내버려두었고, 그로 인해 오늘날 평양은 상당한 규모의 미사일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평양과 협상을 재개하고 미국 행정부 내부의 이견을 종식시키는 이러한 결정이 워싱턴에서 어떤 방식으로 내려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2005년 9월 19일 미국과 북한은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포함하여 북한의 비핵화에 길을 여는 일부 원칙들에 합의했다. 그러나 3일 후 미국 재무부는 중국 마카오에 소재한 방코 델타 아시아(Banco Delta Asia)와 북한이 불법으로 거래를 했다고 비난하면서 국제 금융 시스템으로부터 이 나라를 배제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사실 9월의 협상2)을 좌절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미국 재무부의 서류 속에 극히 미미한 내용만이 담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다.
미 재무부가 찾아낸 유일한 불법행위는 1994년의 일이며, 위폐 2억5천만 달러라는 상대적으로 적은 금액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신중한 일부 옵서버들은 미 재무부가 실제로는 북한이 방코 델타 아시아와 합법적으로 금을 거래하는 것을 걱정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사건이 미 정부 내부의 대립을 반영할 따름이라는 사실을 미국 정부 책임자들이 인식하기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워싱턴과 평양 사이에 진행 중인 관계 정상화를 저지하기 위한 작전이 문제였던 것이다.3) 방코 델타 아시아 사건은 등장 직후 곧 잊혀졌고, 미국은 그 어떤 벌금도 부과하지 않은 채 압류했던 모든 금액을 북한에 되돌려주었다.
전문가인 레온 시걸(Leon V. Sigal)이 지적하고 있듯이, 2007년 2월의 합의는 “북한과 화해하기를 원하는 노선 위로 미국을 올려놓았다.” 낙관론자인 크리스토퍼 힐은 2007년 말까지 북한의 모든 핵 관련 프로그램과 무기들에 대한 완벽한 리스트를 기다리고 있으며, 2008년에 모든 핵 시설이 폐쇄되기를 원한다고 8월에 선언했다. 콘돌리사 라이스가 평양을 방문할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소문은 부시와 김정일 사이의 정상회담이 열릴 수도 있다고 전하고 있었다. 그것은 괜찮은 소식이었다.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그 어떤 미국 행정부도 오랫동안 공을 들이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로 남아있었다.
2월의 합의에 이르기 전까지 부시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가장 어리석은 대외정책을 주재했다. 특히 북한에 대해서가 그랬다. 2002년 10월 그는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HEU)을 사용하면서 두 번째 핵 프로그램을 비밀리에 준비하고 있다고 항의하기 위해 당시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였던 제임스 켈리를 평양에 파송했다. 부시는 클린턴 행정부가 1994년 맺은 기본협정을 즉시 폐기했다. 그 협정에 따르면 영변의 핵시설은 플루토늄 생산 원자로와 함께 8년간 가동을 중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4)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TNP)에서 탈퇴하고 영변 시설을 재가동하면서 즉각 대응했다. 영변에서는 8천 개의 플루토늄 연료봉이 콘크리트 통 속에 저장되어 있는 곳이었다. 북한은 또한 그 수가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핵무기 제조를 시작했다.
이러한 결정에는 다른 그 어떤 보복조치들이 뒤따르지 않았다. 2002년부터 2003년까지 미국의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북한의 도발에 대한 해법을 놓고 미국 정부 내에서 불화가 끊이지 않았던 데서 부분적으로 기인한다. 이란의 HEU 시설 문제를 놓고 현재의 분란이 생긴 것과 마찬가지로, 부통령 측근들을 위시한 일부 미국 당국자들은 북한 핵시설에 대한 폭격을 주장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폭격이 또 다른 한국전쟁을 유발시킬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전에 몰두했기에, 비록 미국이 북한과의 화해정책을 추구하는 남한을 비난했을지라도 그 어떤 행동도 감행되지 않았다. 긴장은 오히려 미국과 남한 사이에 조성되었다.
1994년의 기본협정은 HEU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북한이 속임수를 썼고, 파키스탄의 핵물리학자인 압둘 카데르 칸(Abdul Qadeer Khan)과 거래를 맺었다고 판단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2000년 새로 등장한 부시 행정부에 그 사실을 알렸고, HEU 문제가 플루토늄 및 미사일 문제를 놓고 이전에 체결한 조약을 다시 문제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전했다. HEU는 확보하기 아주 어려운 기술이었고, 고농축 우라늄 폭탄을 제조하려면 여러 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5) 1994년의 기본협정과 미사일에 관련된 합의는 엄격한 통제 조치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억지 도발
2000년부터 2002년까지 부시 대통령은 이러한 정보들을 전혀 중시하지 않았고, 격돌의 정치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미국 협상가들이 1990년대 내내 이해한 한 가지 사실은 그런 방식으로 북한과 대결하는 방식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점이다. 켈리는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워싱턴으로 되돌아갔다. 그의 북한 방문을 위해 선택된 날짜는 가장 억지스러운 고발과 관련을 맺고 있다. 2002년 9월 ‘악의 축’ 국가에 대한 예방적 차원의 공습 독트린에 대한 공식 발표가 이루어진 직후 그의 메시지가 북한에 전달된 것이다. 몇 달 후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한다. 당시 북한은 당시 사담 후세인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그리고 북한은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억지력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우라늄 농축에 대한 북한 핵 프로그램에 대한 미국 정보당국의 정보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정보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오늘날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라크를 본 따 북한은 수천 개에 달하는 알루미늄 튜브를 사들였다. 그러나 이 튜브들은 원심기에 요구되는 고도로 빠른 회전에 사용되기에는 충분히 견고하지 않다고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CIA는 2002년 이 튜브들이 “막대한 생산능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발표했다. 그 후 미국은 고농축 우라늄 폭탄의 개발에 필요한 대규모 저장에 대해 신뢰할 만한 자료들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
북한이 지난해에 실험한 폭탄은 플루토늄을 사용했지 고농축 우라늄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왜 북한이 이 무기를 실험하기로 선택했는지는 의문으로 남아있다. 북한은 자신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확신시키는데 무려 15년이 걸렸다. 1992년에 CIA는 북한이 하나 혹은 두 개의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다고 추정했다. 이러한 수치는 십여 년 동안 진실로 통용되었다. ‘북한의 핵폭탄’을 둘러싼 모호성은 북한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이스라엘 경우처럼, 한 국가가 실험이나 공식발표를 거치지 않고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은 다른 지역 국가들이 핵으로 무장하게끔 만들지 않고서도 북한에 믿을 만한 억제수단을 제공했다.
명백한 이득도 없이 북한은 왜 이러한 모호함을 종식시키려 애쓰는 것일까? 핵실험은 2006년 7월의 미사일 발사에 반발해 9월부터 북한에 대한 석유 수출을 중단했던 중국에 대한 메시지일 수 있다. 이러한 가정 하에 북한은 자신이 겁을 먹지 않고 있으며, 하나의 사건이 종결된 후에야 6자 회담을 재개하겠다는 보여주기 위하여 핵실험을 강행한 것으로 보인다.
부시가 왜 이러한 합의를 이끌어내려고 마음을 먹었을까? 부분적으로는 2006년의 총선이 공화당의 장기 집권에 대한 백악관의 희망을 무화시켰고, 또 다른 부분적으로는 내정 차원에서 미국 대통령의 입지 약화가 국제적 차원에서 비슷한 현상을 동반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들이 전적으로 설득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2003~2004년에 북한 지도자들은 실제로 폭격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그러나 미국 군대가 해외 여러 지역에 과도하게 파병되어 있었고, 미국 국방부는 당시 한반도에 전투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북한의 전략은 공식적으로 핵보유국이 되고, 2년간 미국의 제재를 견뎌낸 후 미국의 차기 대통령과 협상을 시도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에 따라 이번에는 평양에서가 아니라 워싱턴에서 이루어졌다. 가장 믿을 만한 가정에 따라 이란이 훨씬 더 큰 핵실험 위험을 가지고 있다고 백안관은 판단했다. 북한과의 의견 조율이 이루어질 경우, 테헤란은 자체 핵 프로그램을 종신시키는데 상당한 압력수단이 될 수 있었다. 부시 대통령이 이란에 대해 무력행사를 결정할 수 있으려면 북한이 무장 해제되든지 아니면 잊혀지는 것이 필요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미국과 남한의 상호관계는 현저히 악화되었다. 북한과 위험한 상황을 만들어내면서도 남한을 소홀히 응대하면서, 또 행동을 통해 미국 대통령은 남한과의 역사적 관계의 규칙과 기대를 저버렸다.
남한에서는 반미주의가 중동에서처럼 강대국에 대한 심각한 거부나 미국 문화나 가치에 대한 거부 형태를 띤 적이 결코 없다. 하지만 2001년부터 남한에서,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서 미국 이미지는 상당히 실추되었다. 부시가 백악관의 주인이 되기 전 상당히 많은 남한 사람들이 미국에 대해 호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여론은 양분되어 있다. 여론조사 대상이 된 43%가 미국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그에 가까운 의견을 가지고 있었고, 단지 22%의 젊은이들만이 미국에 대해 극도로 호의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6)
이러한 변화는 평양에 대한 미국의 정책, 그리고 ‘햇볕정책’을 유지하기를 갈망하는 남한사람들의 염원과 관련을 맺고 있다.
남한 사람들이 즉각 위험을 감지한 것처럼, 부시 독트린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전쟁 속으로 남한이 끌려 들어감을 의미하고 있었다. 예방적 전쟁 독트린이 발표된 직후, 노무현 대통령의 한 보좌관은 남한의 동의 없는 북한에 대한 공격은 미국과의 동맹을 재고하게 만들 것이라고 미국에 알렸다. 남한 지도자들은 거듭 반복해서 자신들과의 논의 및 동의를 거치지 않고 북한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미국으로부터 받아내려고 애썼다. 남한이 그러한 보장을 받아낸 적은 한번도 없다. 북한이 서울 북쪽에 위치한 산악지방에 포진시킨 포대를 통해 단 몇 시간 만에 서울을 파괴시킬 능력이 있기에, 부시 독트린이 남한에 초래한 전적인 혼란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양국 사이의 관계가 너무나 퇴보하였기에 신뢰를 회복하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아 보인다. 2월의 합의는 관계 재편으로 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1994년과 2005년에 애썼던 것처럼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고, 한반도에서의 모든 무력 사용에 대해 서울에 거부권을 보장할 수 있으며, 타이완과 분쟁이 생길 경우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동원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남한에 해주고, 마지막으로 남한에 주둔시킨 시대착오적인 군대의 존재를 축소시킬 수도 있다. 오늘날 그러한 가정들은 상상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남한, 중국과 러시아 3국은 미국이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북한은 승리를 거두었고, 자신이 원하고 1990년대에 자신이 이미 제안했던 것을 얻었다. 그것은 경제 지원에 맞서 핵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워싱턴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었다. 그 제안은 미국에 의해 조직적으로 거부되고, 조롱을 받았다.
사실 1990년대에 거둔 외교적 승리는 남한의 옛 대통령인 김대중의 작품이다. 200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던 그는 북한이 미국과의 새 관계를 구축하는 것을 전제로 핵 프로그램과 핵미사일을 포기할 것이라면서 클린턴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지면 북한이 미군의 남한 주둔에 대해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김대중은 생각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중국과 일본이 미국만큼이나 김정일을 불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김대중은 1945년 이후 미국이 동북아시아에 수립한 국제질서 체제 내에서 새로운 안보조약에 참여하는 것을 김정일이 받아들이리라고 판단했다. 최소한 미국은 친구나 동맹국 정도는 아니더라도 북한의 무장 해제를 얻어낼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중국과 잠을 깨는 러시아에 맞서 균형을 설정하고, 필요할 경우 일본에 대해 억제요소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북한이 냉전기간 동안 소련 및 중국과 그랬던 것처럼 서로를 대립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이러한 새로운 사고가 부시 대통령에게 영향을 끼칠지는 미지수이다. 하지만 21세기의 미국 입장에서는 동북아시아에서 채택할 수 있는 논리적 전략을 의미한다. 우리가 목격한 이상한 일련의 사건들 끝에 부시는 ‘악마적인’ 김정일 곁에 있을 것이고, 두 사람은 모두 ‘평화의 사도’가 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나쁠 것은 없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좋은 것이니까. 브루스 커밍스 | 번역·이상빈
1) 이 두 국가들은 유엔이 무력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받아낸 후에야 유엔헌장 제7장과 관련된 제재조치에 찬성표를 던졌다.
2)John McGlynn, “Financial sanctions and North Korea:In search of the evidence of currency counterfeiting and money laundering”, Japan Focus, 2007년 7월 7일자 ; www.japanfocus.com/2007/products/details/2463.
3)Steven R. Weisman, “How US turned North Korean funds into a bargaining chip”, New York Times, 2007년 4월 12일자 ; www.nytimes.com/2007/04/12/world/asia/12bank.html
4)부시와 그의 보좌관들은 8년간의 동결기간이 해제되지 않았는데도 북한이 이 협정을 준수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유엔의 조사관들은 현장을 매일 방문하고 있다. 봉인된 상태의 모든 시설은 항구적으로 감시되고 있다.
5)Selig S. Harrison의 기사 “Did North Korea cheat?”, Foreign Affairs, New York, 2005년 1-2월호를 참조할 것. ; www.foreignaffairs.org/20050101faessay84109/selig-s-harrison/did-north-korea-cheat.html
6)Meredith Woo-Cumings and William Watts, in David I. Steinberg(대표 집필), Korean Attitudes Toward the United States, M. E. Sharpe, Armonk, New York, 2005 ; Pew Global Attitudes Project, www.pewglobal.org/commentary/display.php?AnalysisID=67
남북한 정상은 2000년 6월 역사상 처음으로 평양에서 서로 만났다. 조선 인민민주주의공화국 지도자 김정일은 답례로 서울을 방문하게 되어있었으나, 이번에 또 다시 그가 남한 지도자를 영접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노무현 대통령과 그의 전임자 김대중 대통령은 소위 ‘햇볕정책’이라 불리는 화해정책을 통해 수십 년간의 적대 관계를 종식했다. 세계 10위의 경제 강대국인 남한은 북한보다 여러 면에서 현저히 앞서 있다. 남한 입장에서는 김정일로 하여금 일정을 잡도록 하는 것보다 참을성 있게 개방정책을 추구하는 것이 덜 비싸게 먹힌다. 게다가 초대에 응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은 그로부터 정치적 이득을 얻어내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새로운 대통령으로 출마할 수 없기에 인기가 떨어지고 있는 중인 이 남한 지도자는 12월에 있을 대선에서 자신의 후계자가 당선될 기회를 확대시키려 애쓰고 있음이 틀림없다.
남한 정치를 조종할 수 있다고 오랫동안 생각해온 북한은 겉보기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1998년 화해정책이 가동되자 북한에 대한 남한 사람들의 인식이 요동쳤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을 ‘사디스트’로 규정하는 프로퍼갠더에 익숙한 남한 사람들은 실수로 잃어버린, 약간은 엉뚱한 사촌 정도로 북한사람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정상회담은 이 놀라운 인식 변화의 정점을 보여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반도가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동북아시아 경제정책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지하며, 후속세대에 ‘동북아 경제시대’를 물려주기를 원하고 있다.
정상회담은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김정일 지도자 사이의 예기치 않은 화해 무드 속에서 열린다. 이러한 화해 분위기는 아직도 그 계기가 잘 알려지지 않은, 2007년 2월 13일 이루어진 비핵화에 대한 합의를 통해 감지되고 있다. 2006년 7월 북한은 7발의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미국의 국경일을 ‘경축’했다. 그중에는 장거리 미사일인 대포동 2호와 일부 중거리 미사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 10월 9일 북한 지도자들은 최초의 핵실험을 강행했고, 그에 따라 유엔은 제재 조치를 취했다. 역사상 최초로 러시아와 중국이 이러한 제재를 지지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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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리게티 |
ⓒ 르몽드 디플로마티끄 |
모호한 외교적 전환
부시 대통령은 “나쁜 행동거지에 대해서는 그 어떤 보상도 없다”고 항상 강조했다. 그는 북한과의 모든 형태의 직접 협상을 조직적으로 거부했다. “우리는 악과 협상하지 않는 대신 그것을 물리칠 것입니다”라고 2004년 리처드 체니 부통령이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2월의 합의는 미국의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와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 베이징과 베를린에서 직접 접촉한 후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2년 전부터 북한의 핵 프로그램 문제를 놓고 남북한, 중국, 미국, 일본 및 러시아가 함께 모이는 6자 회담에서 소개된 것이다.
얻어낸 결과는 획기적인 것이다. 북한 플루토늄 원자로를 봉인한 후 폐쇄할 것,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취한 제재와 금수 조치를 점진적으로 제거할 것, 미 국무부가 작성한 ‘깡패 국가’ 리스트에서 북한을 삭제할 것, 국제원자력기구 조사관들의 북한 재입국, 양국간의 관계 정상화를 도모하고 한국전쟁을 종식시키는 평화조약 체결의 모색 등이 그 내용이었다.
하지만 부시가 요구사항들을 주문하기 전에 이 모든 조치가 이미 진행 중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빌 클린턴 행정부 역시 북한의 미사일 프로그램을 중지시키기 위해 비슷한 계획을 짠 바 있었다. 합의가 2000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부시는 그 합의가 와해되도록 내버려두었고, 그로 인해 오늘날 평양은 상당한 규모의 미사일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평양과 협상을 재개하고 미국 행정부 내부의 이견을 종식시키는 이러한 결정이 워싱턴에서 어떤 방식으로 내려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2005년 9월 19일 미국과 북한은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포함하여 북한의 비핵화에 길을 여는 일부 원칙들에 합의했다. 그러나 3일 후 미국 재무부는 중국 마카오에 소재한 방코 델타 아시아(Banco Delta Asia)와 북한이 불법으로 거래를 했다고 비난하면서 국제 금융 시스템으로부터 이 나라를 배제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사실 9월의 협상2)을 좌절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미국 재무부의 서류 속에 극히 미미한 내용만이 담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다.
미 재무부가 찾아낸 유일한 불법행위는 1994년의 일이며, 위폐 2억5천만 달러라는 상대적으로 적은 금액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신중한 일부 옵서버들은 미 재무부가 실제로는 북한이 방코 델타 아시아와 합법적으로 금을 거래하는 것을 걱정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사건이 미 정부 내부의 대립을 반영할 따름이라는 사실을 미국 정부 책임자들이 인식하기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워싱턴과 평양 사이에 진행 중인 관계 정상화를 저지하기 위한 작전이 문제였던 것이다.3) 방코 델타 아시아 사건은 등장 직후 곧 잊혀졌고, 미국은 그 어떤 벌금도 부과하지 않은 채 압류했던 모든 금액을 북한에 되돌려주었다.
전문가인 레온 시걸(Leon V. Sigal)이 지적하고 있듯이, 2007년 2월의 합의는 “북한과 화해하기를 원하는 노선 위로 미국을 올려놓았다.” 낙관론자인 크리스토퍼 힐은 2007년 말까지 북한의 모든 핵 관련 프로그램과 무기들에 대한 완벽한 리스트를 기다리고 있으며, 2008년에 모든 핵 시설이 폐쇄되기를 원한다고 8월에 선언했다. 콘돌리사 라이스가 평양을 방문할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소문은 부시와 김정일 사이의 정상회담이 열릴 수도 있다고 전하고 있었다. 그것은 괜찮은 소식이었다.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그 어떤 미국 행정부도 오랫동안 공을 들이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로 남아있었다.
2월의 합의에 이르기 전까지 부시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가장 어리석은 대외정책을 주재했다. 특히 북한에 대해서가 그랬다. 2002년 10월 그는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HEU)을 사용하면서 두 번째 핵 프로그램을 비밀리에 준비하고 있다고 항의하기 위해 당시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였던 제임스 켈리를 평양에 파송했다. 부시는 클린턴 행정부가 1994년 맺은 기본협정을 즉시 폐기했다. 그 협정에 따르면 영변의 핵시설은 플루토늄 생산 원자로와 함께 8년간 가동을 중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4)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TNP)에서 탈퇴하고 영변 시설을 재가동하면서 즉각 대응했다. 영변에서는 8천 개의 플루토늄 연료봉이 콘크리트 통 속에 저장되어 있는 곳이었다. 북한은 또한 그 수가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핵무기 제조를 시작했다.
이러한 결정에는 다른 그 어떤 보복조치들이 뒤따르지 않았다. 2002년부터 2003년까지 미국의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북한의 도발에 대한 해법을 놓고 미국 정부 내에서 불화가 끊이지 않았던 데서 부분적으로 기인한다. 이란의 HEU 시설 문제를 놓고 현재의 분란이 생긴 것과 마찬가지로, 부통령 측근들을 위시한 일부 미국 당국자들은 북한 핵시설에 대한 폭격을 주장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폭격이 또 다른 한국전쟁을 유발시킬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전에 몰두했기에, 비록 미국이 북한과의 화해정책을 추구하는 남한을 비난했을지라도 그 어떤 행동도 감행되지 않았다. 긴장은 오히려 미국과 남한 사이에 조성되었다.
1994년의 기본협정은 HEU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북한이 속임수를 썼고, 파키스탄의 핵물리학자인 압둘 카데르 칸(Abdul Qadeer Khan)과 거래를 맺었다고 판단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2000년 새로 등장한 부시 행정부에 그 사실을 알렸고, HEU 문제가 플루토늄 및 미사일 문제를 놓고 이전에 체결한 조약을 다시 문제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전했다. HEU는 확보하기 아주 어려운 기술이었고, 고농축 우라늄 폭탄을 제조하려면 여러 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5) 1994년의 기본협정과 미사일에 관련된 합의는 엄격한 통제 조치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억지 도발
2000년부터 2002년까지 부시 대통령은 이러한 정보들을 전혀 중시하지 않았고, 격돌의 정치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미국 협상가들이 1990년대 내내 이해한 한 가지 사실은 그런 방식으로 북한과 대결하는 방식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점이다. 켈리는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워싱턴으로 되돌아갔다. 그의 북한 방문을 위해 선택된 날짜는 가장 억지스러운 고발과 관련을 맺고 있다. 2002년 9월 ‘악의 축’ 국가에 대한 예방적 차원의 공습 독트린에 대한 공식 발표가 이루어진 직후 그의 메시지가 북한에 전달된 것이다. 몇 달 후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한다. 당시 북한은 당시 사담 후세인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그리고 북한은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억지력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우라늄 농축에 대한 북한 핵 프로그램에 대한 미국 정보당국의 정보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정보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오늘날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라크를 본 따 북한은 수천 개에 달하는 알루미늄 튜브를 사들였다. 그러나 이 튜브들은 원심기에 요구되는 고도로 빠른 회전에 사용되기에는 충분히 견고하지 않다고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CIA는 2002년 이 튜브들이 “막대한 생산능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발표했다. 그 후 미국은 고농축 우라늄 폭탄의 개발에 필요한 대규모 저장에 대해 신뢰할 만한 자료들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
북한이 지난해에 실험한 폭탄은 플루토늄을 사용했지 고농축 우라늄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왜 북한이 이 무기를 실험하기로 선택했는지는 의문으로 남아있다. 북한은 자신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확신시키는데 무려 15년이 걸렸다. 1992년에 CIA는 북한이 하나 혹은 두 개의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다고 추정했다. 이러한 수치는 십여 년 동안 진실로 통용되었다. ‘북한의 핵폭탄’을 둘러싼 모호성은 북한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이스라엘 경우처럼, 한 국가가 실험이나 공식발표를 거치지 않고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은 다른 지역 국가들이 핵으로 무장하게끔 만들지 않고서도 북한에 믿을 만한 억제수단을 제공했다.
명백한 이득도 없이 북한은 왜 이러한 모호함을 종식시키려 애쓰는 것일까? 핵실험은 2006년 7월의 미사일 발사에 반발해 9월부터 북한에 대한 석유 수출을 중단했던 중국에 대한 메시지일 수 있다. 이러한 가정 하에 북한은 자신이 겁을 먹지 않고 있으며, 하나의 사건이 종결된 후에야 6자 회담을 재개하겠다는 보여주기 위하여 핵실험을 강행한 것으로 보인다.
부시가 왜 이러한 합의를 이끌어내려고 마음을 먹었을까? 부분적으로는 2006년의 총선이 공화당의 장기 집권에 대한 백악관의 희망을 무화시켰고, 또 다른 부분적으로는 내정 차원에서 미국 대통령의 입지 약화가 국제적 차원에서 비슷한 현상을 동반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들이 전적으로 설득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2003~2004년에 북한 지도자들은 실제로 폭격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그러나 미국 군대가 해외 여러 지역에 과도하게 파병되어 있었고, 미국 국방부는 당시 한반도에 전투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북한의 전략은 공식적으로 핵보유국이 되고, 2년간 미국의 제재를 견뎌낸 후 미국의 차기 대통령과 협상을 시도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에 따라 이번에는 평양에서가 아니라 워싱턴에서 이루어졌다. 가장 믿을 만한 가정에 따라 이란이 훨씬 더 큰 핵실험 위험을 가지고 있다고 백안관은 판단했다. 북한과의 의견 조율이 이루어질 경우, 테헤란은 자체 핵 프로그램을 종신시키는데 상당한 압력수단이 될 수 있었다. 부시 대통령이 이란에 대해 무력행사를 결정할 수 있으려면 북한이 무장 해제되든지 아니면 잊혀지는 것이 필요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미국과 남한의 상호관계는 현저히 악화되었다. 북한과 위험한 상황을 만들어내면서도 남한을 소홀히 응대하면서, 또 행동을 통해 미국 대통령은 남한과의 역사적 관계의 규칙과 기대를 저버렸다.
남한에서는 반미주의가 중동에서처럼 강대국에 대한 심각한 거부나 미국 문화나 가치에 대한 거부 형태를 띤 적이 결코 없다. 하지만 2001년부터 남한에서,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서 미국 이미지는 상당히 실추되었다. 부시가 백악관의 주인이 되기 전 상당히 많은 남한 사람들이 미국에 대해 호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여론은 양분되어 있다. 여론조사 대상이 된 43%가 미국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그에 가까운 의견을 가지고 있었고, 단지 22%의 젊은이들만이 미국에 대해 극도로 호의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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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11일 비무장지대 내 판문점에서 한 북한군 병사가 근무중인 미군에게 말을 걸고 있다. |
ⓒ 르몽드 디플로마티끄 |
이러한 변화는 평양에 대한 미국의 정책, 그리고 ‘햇볕정책’을 유지하기를 갈망하는 남한사람들의 염원과 관련을 맺고 있다.
남한 사람들이 즉각 위험을 감지한 것처럼, 부시 독트린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전쟁 속으로 남한이 끌려 들어감을 의미하고 있었다. 예방적 전쟁 독트린이 발표된 직후, 노무현 대통령의 한 보좌관은 남한의 동의 없는 북한에 대한 공격은 미국과의 동맹을 재고하게 만들 것이라고 미국에 알렸다. 남한 지도자들은 거듭 반복해서 자신들과의 논의 및 동의를 거치지 않고 북한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미국으로부터 받아내려고 애썼다. 남한이 그러한 보장을 받아낸 적은 한번도 없다. 북한이 서울 북쪽에 위치한 산악지방에 포진시킨 포대를 통해 단 몇 시간 만에 서울을 파괴시킬 능력이 있기에, 부시 독트린이 남한에 초래한 전적인 혼란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양국 사이의 관계가 너무나 퇴보하였기에 신뢰를 회복하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아 보인다. 2월의 합의는 관계 재편으로 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1994년과 2005년에 애썼던 것처럼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고, 한반도에서의 모든 무력 사용에 대해 서울에 거부권을 보장할 수 있으며, 타이완과 분쟁이 생길 경우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동원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남한에 해주고, 마지막으로 남한에 주둔시킨 시대착오적인 군대의 존재를 축소시킬 수도 있다. 오늘날 그러한 가정들은 상상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남한, 중국과 러시아 3국은 미국이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북한은 승리를 거두었고, 자신이 원하고 1990년대에 자신이 이미 제안했던 것을 얻었다. 그것은 경제 지원에 맞서 핵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워싱턴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었다. 그 제안은 미국에 의해 조직적으로 거부되고, 조롱을 받았다.
사실 1990년대에 거둔 외교적 승리는 남한의 옛 대통령인 김대중의 작품이다. 200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던 그는 북한이 미국과의 새 관계를 구축하는 것을 전제로 핵 프로그램과 핵미사일을 포기할 것이라면서 클린턴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지면 북한이 미군의 남한 주둔에 대해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김대중은 생각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중국과 일본이 미국만큼이나 김정일을 불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김대중은 1945년 이후 미국이 동북아시아에 수립한 국제질서 체제 내에서 새로운 안보조약에 참여하는 것을 김정일이 받아들이리라고 판단했다. 최소한 미국은 친구나 동맹국 정도는 아니더라도 북한의 무장 해제를 얻어낼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중국과 잠을 깨는 러시아에 맞서 균형을 설정하고, 필요할 경우 일본에 대해 억제요소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북한이 냉전기간 동안 소련 및 중국과 그랬던 것처럼 서로를 대립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이러한 새로운 사고가 부시 대통령에게 영향을 끼칠지는 미지수이다. 하지만 21세기의 미국 입장에서는 동북아시아에서 채택할 수 있는 논리적 전략을 의미한다. 우리가 목격한 이상한 일련의 사건들 끝에 부시는 ‘악마적인’ 김정일 곁에 있을 것이고, 두 사람은 모두 ‘평화의 사도’가 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나쁠 것은 없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좋은 것이니까. 브루스 커밍스 | 번역·이상빈
1) 이 두 국가들은 유엔이 무력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받아낸 후에야 유엔헌장 제7장과 관련된 제재조치에 찬성표를 던졌다.
2)John McGlynn, “Financial sanctions and North Korea:In search of the evidence of currency counterfeiting and money laundering”, Japan Focus, 2007년 7월 7일자 ; www.japanfocus.com/2007/products/details/2463.
3)Steven R. Weisman, “How US turned North Korean funds into a bargaining chip”, New York Times, 2007년 4월 12일자 ; www.nytimes.com/2007/04/12/world/asia/12bank.html
4)부시와 그의 보좌관들은 8년간의 동결기간이 해제되지 않았는데도 북한이 이 협정을 준수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유엔의 조사관들은 현장을 매일 방문하고 있다. 봉인된 상태의 모든 시설은 항구적으로 감시되고 있다.
5)Selig S. Harrison의 기사 “Did North Korea cheat?”, Foreign Affairs, New York, 2005년 1-2월호를 참조할 것. ; www.foreignaffairs.org/20050101faessay84109/selig-s-harrison/did-north-korea-cheat.html
6)Meredith Woo-Cumings and William Watts, in David I. Steinberg(대표 집필), Korean Attitudes Toward the United States, M. E. Sharpe, Armonk, New York, 2005 ; Pew Global Attitudes Project, www.pewglobal.org/commentary/display.php?AnalysisID=67
기사입력 : 2008-03-19 19:01:06
최종편집 : 2008-03-20 08:58:55
최종편집 : 2008-03-20 08:58:55
ⓒ르몽드 디플로마티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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