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했으면 조직이 다 털렸겠어”
[인물이야기] 박석률
1970년대 후반은 변혁운동에서 세대교체기였다.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죽음을 피해 살아남은 이들이 그 이전 시대를 대표한다면 1970년대에 대학과 현장에 터를 잡기 시작한 이들이 1980년대의 폭발적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즉 남민전은 이들 양자가 결합했던 조직이었다.
월간『말』은 3월 호 ‘인물이야기’에서 남민전의 중앙위원을 지냈던 안재구를 소개한 바 있다. 안재구가 해방 이전부터의 좌익운동에 연결되어 있었던 인물이라면, 이번 호에서 소개하는 박석률은 다음 세대의 대표적 인물에 속한다.
‘먹물 배신자’는 되기 싫다
박석률은 전남에서 태어나 광주 서중과 경기고등학교를 나왔다. 중고등학교 입시가 있던 시절이니 명문 중의 명문인데다가, 대학생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니 이미 ‘준’ 지식인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박석률은 지식에 대한 애착이 강한 편은 아니었다. 임꺽정의 서림같은 ‘먹물 배신자’가 되기 싫었던 것이다. 실천을 중시하는 그의 기풍은 이 시절 즈음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1966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입시에 실패한 박석률은 후기 대학을 다니면서 데모로 날을 지샜다. 그러다가 다시 시험을 보고 1970년에 서강대학교에 입학했는데, 당시 서강대 학생운동 진영으로서는 ‘선배급’ 활동가가 갑자기 나타난 셈이 되었다. 서강대는 서울지역에서 비교적 조용한 학교였는데 1973년 말에서 1974년 초에는 학생운동이 특히 활발했다. 서강대는 1974년의 첫 시위를 터뜨리면서 민청학련 사건에 끌려들어간다. 같은 대학 71학번인 김선택이 서울대나 고대 학생들과 교류를 갖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시위 계획을 공유한다든지 정기적 모임을 갖는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유신 반대 세력을 일망타진하려했던 박정희 정권은 권오성, 김윤 등과 함께 박석률을 잡아들인다. 이들은 긴급조치 4호가 발표되기 이전에 잡혀갔는데도, 긴급조치 4호에 의해 재판을 받았다. 이 재판에서 7년형을 선고받은 박석률은 10개월만에 출소한다. 학생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형량 인플레이션이 심하던 시절이니 특이할 것도 없었다. 민청학련 사건은 대규모 ‘빵잽이’를 배출함으로써 정권의 의도와는 반대로 직업적인 활동가들을 대량 생산한 결과를 빚는다. 박석률 역시 얼마안가 남민전에 가입함으로써 자신의 혁명활동을 ‘업그레이드’했다.
이 업그레이드는 어떤 의미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박석률의 주장처럼 “박정희 유신통치에 대항할 수 있는 길이라고는 통째로 잡아가라고 조직성원을 공개하지 않는 방법 이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한번으로 끝나는 투쟁이 아닌데, 지속적으로 투쟁하여 이기기 위해서는 조직성원이 이름만 올린 그 자체로 예비구금 당하거나, 한사람도 남김없이 잡혀가서야 어떻게 되겠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남민전준비위라는 조직도 비공개 지하조직화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조직운동은 결국 그 결과가 증명한다”
다시 민청학련으로 돌아가서,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 배후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터뜨리고 그 지도부 8인에 대해 사형을 집행한다. 한국 사법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기억되는 이 ‘법살(法殺)’은 공포와 증오를 동시에 키웠다. 박석률은 남민전 사건 당시에 “인혁보다 두 배는 죽을 줄 알았다”고 했으니, 이 시대에 비합법 전위조직에 가입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남민전은 이재문(옥사), 신향식(사형), 안재구(무기) 등이 중앙위원회를 구성했고 궁극적으로 전위정당과 전선체의 결성을 목표로 한 준비조직이었다. 그러나 박석률은 남민전에 대한 지나친 평가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흔히 떠올리게 되는 상하간의 엄격한 지도가 있는 정연한 조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에게 남민전은 “목숨을 걸고 같이 싸우는 의미”로서의 ‘조직’이었던 것이다. “한 명이 그만 두려면 서로를 죽여야 하는” 비합법 운동에서 박석률은 남민전의 선언이나 투쟁 방식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은 상태에서도 조직활동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석률은 조직사업에 수완을 발휘했다. 그를 취조한 검사가 ‘검거된 84명 중에서 9분의1이 당신이 조직한 사람’이라고 공박했는데, 이를 놓고 박석률은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안했으면 내가 그렇게나 많은 비중을 차지했을까” 의아했다고 한다.
남민전이 탄압을 받아 완전히 와해된 것에 대해 박석률의 시각은 차갑다. “제대로 했으면 조직이 그렇게 다 털렸겠는가. 조직운동은 결국 그 결과가 증명한다”는 것이다. 사형을 받았거나 옥사한 선배들, 그리고 석방 이후에도 변혁운동에 나섰던 몇몇을 제외하면 “존경하는 선배가 거의 없다”는 말도 했다. 이는 박석률의 운동에 대한 태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민주화운동에 따른 수감경력이 ‘훈장’처럼 받아들여지는 시대에도 박석률에게는 스스로를 보호하는 데 무능했던 남민전 ‘사건’이 아름답거나 자랑스러운 기억으로만 남아있지는 않다.
군사정권도 바보는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자신을 공격했던 이들에 대해 정권은 목숨을 요구했다. 이른바 ‘긴쪼’(긴급조치)시대에도 교정에서 돌 몇 번 던진 이들에게는 많아야 3년이었지만, 남민전 성원에게는 깎고 또 깎아도 10년 가까운 수감생활이 돌아갔다. 박석률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88년 12월 형집행정지로 나오기까지 9년을 감옥안에서 ‘썩었다’. 사회와 격리된 시간이 길면 길수록 복귀에는 더 많은 시간이 들어간다. 아무리 감옥이 ‘혁명의 학교’라고 하더라도 감옥은 감옥인 법이다.
남민전에는 유명 인사가 많다. 현 정부의 실세 중 하나로 불리는 이재오 전 한나라당 의원이 그렇고, 홍세화 한겨레신문 기획위원,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권오헌 양심수후원회장, 이수일 전 전교조위원장, 김남주 시인 등이 남민전의 ‘전사’였다. 남민전의 구성원을 ‘전사’로 부르는 것은 이들이 일종의 외곽조직인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이하 민투)를 조직한 것과 연관이 있다. 민투의 성원은 ‘투사’, 남민전의 성원은 ‘전사’가 된다.
박석률이 남민전에 끌어들인 사람이 홍세화다. 홍세화는 사건 당시 회사 일로 프랑스에 있었는데, 그에게 국제 전화를 걸어 도피를 지시한 사람도 박석률이다. 박석률은 홍세화가 영구 귀국한 2001년 이후에도 막역한 사이로 지낸다. 김남주도 박석률이 끌어들였다. 김남주도 광주 서중을 나왔으니 동문이기도 하고, 광주를 떠나 서울로 왔을 때 뒤를 봐준 사람이 박석률이었다. 박석률도 시를 쓰니 여러모로 잘 어울렸을 것이다. 그러나 박석률의 평가는 ‘짜다’.
“원래 글 쓰는 사람들은 잘 안 믿는다. 최남선이나 이광수나 그 재주를 가지고도 결국 다 배신하지 않았냐. 문약(文弱)은 가장 경계하는 바다. 김남주도 절반만 믿는다. 그는 결국 동구 사회주의 몰락하고 속병나서 죽었다. 동구 몰락한 것과 우리가 무슨 관계란 말인가? 교훈을 찾으면 될 일이지 속병나 죽을 일이 아니다.” 목숨을 함께 걸었던 동지가 아니라면 쉽게 하기 어려울 정도로 냉정하다.
박석률이 ‘먹어주는’ 지식인이라면 고 조영래 변호사 정도다. 대구 출생으로 경기고등학교 동창이 되는 그에 대해서만큼은 “똑똑하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조영래는 경기고등학교 시절부터 데모에 앞장섰는데, 박석률은 “맨날 데모만하면서 모의고사보면 꼭 1등을 했다”며 자랑스러워 했다. 조영래는 박석률이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법률적 조언을 주는 벗이었다.
남민전 사건에서 박석률의 동생인 박석삼도 연루된다. 석삼은 형과는 별도로 광주 지역을 근거로 활동했는데, 1978년의 함평고구마투쟁, 교육지표사건으로 당국의 주목을 받게되자 서울로 피신한다. 그는 전수진, 홍세화의 집에서 숨어살면서 청량리역 삐라살포 투쟁 등에 관여한다. 박석률은 검거되기 전까지 동생의 가입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두 형제는 각각 전주와 대전교도소에 갇히는 데 박석률은 정약용, 약전 형제의 고사를 들어 동생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석삼아! 남도(南道) 따라 가는 길! 그 길에는 네가 있는 전주가 있고, 가족들이 있는 광주가 있다. 그동안 소식 없어 못내 궁금하더니, 너의 편지 보고 새삼 생각나는구나. 19세기 초, 정약용 형제가 남도길을 따라, 나주 입구에서 헤어져 한쪽은 강진으로, 한쪽은 흑산도로 갈리던 것이…….”
소련의 몰락에 담담할 수 있었던 이유
광주와 6월 항쟁을 감옥안에서 지켜본 박석률은 1988년 12월 22일 드디어 세상으로 돌아온다. 곧바로 망월동으로 가 큰 절을 올린 그는 전남사회문제연구소를 만들면서 다시 현실에 개입한다. 이 때쯤 그를 지켜보던 ‘어른’들에게 큰 문제는 결혼 문제였다. 가정을 차려야 자리를 잡을텐데, 이미 마흔이 넘은 ‘간첩’을 곱게 볼 처녀가 있을 리 없었다. 이런 문제를 잘 푸는 건 예나 지금이나 종교인들이다.
그가 1989년 초 문익환 목사를 찾았을 때다. 문 목사는 박석률에게 북에서 온 한 통의 편지를 보여줬다. “통일원에서 이 편지를 전해 받았어요. 날더러 가까운 시일 안에 평양으로 오라는 초청장이야. 어떻게들 생각해?” 참으로 빠르게 움직이던 시국이었다. 문 목사는 박석률에게 한 가지를 더 제안한다. “감옥에서 고생하고 나온 사람들은 한 10년 정도는 몸도 쉬고 건강도 살펴야 해. 내가 좋은 규수감이 있어 석률이한테 소개해 주려고 하니 기다려 봐.” 문 목사가 약속을 지킨 것은 몇 달 후, 문 목사의 부인인 박용길 장로가 한 여성을 소개한 것이다. 방북이라는 거사를 앞두고 까마득한 후배의 혼사까지 걱정했던 거인의 풍모였다. 그렇다고 끝까지 좋은 것은 아니다. 학창 시절부터 여자에게 인기가 없었던 박석률은 김남주가 소개한 여성과도 잘 안되고, 결국 진관 스님이 소개한 또 다른 처녀와 결혼을 한다.
박석률이 세상으로 복귀했던 1980년대 후반은 세계사적으로도 격동기였다. 이미 한차례 ‘페레스트로이카’ 논쟁이 지나갔지만, 연이은 동구권과 소련의 몰락은 큰 충격을 줬다. 그러나 이미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난 그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는 감옥안에서 3년간 ‘쌀뜨물만 먹고 살았다’. 췌장염을 앓았던 것이다.
감옥에서 무기수는 ‘전차’라는 은어로 불린다. 형기가 없으니 끊임없이 평행선을 그리며 달리는 철로위의 전차와 같다는 것이다. 그가 갇혀있던 대전교도소의 장기수 사동에는 살아서 걸어나간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직 스피커폰을 통해 교도관과의 의사소통만 가능했던 독거방에서 그는 시도때도 없이 ‘잠을 잤다’. 일종의 가사상태로 4~50일을 지내자 몸무게가 20Kg이상 빠졌다. 하루 밤에 소변을 100번 이상 볼 정도에 몸에 이상이 왔다.
“쌀뜨물만 먹고 죽을둥살둥 하면서 고민을 했다. 어차피 세상이 한 번 바뀌지 않고는 못 나갈텐데 과연 어떻게 될까? 그 때 내렸던 결론이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감옥 나와서 소련 망하고 동구권 망할 때 담담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가 정말로 힘들었던 건 1994년이었다. 그 해 벽두에 김남주가 세상을 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밤늦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박석률은 뉴스의 자막으로 흐르던 긴급뉴스에 큰 충격을 받았다. ‘문익환 목사 오늘 오후 급서’ 영결식을 치르던 날은 보기 드문 한파가 몰아닥쳤다. 그리고 뒤이은 통일운동 내부의 노선 논쟁과 세 번째의 감옥생활을 하게 만든 범민련 사건이 뒤따라 왔다.
장기 구금생활은 청년을 중년으로 변하게 만든다. 혁명 투사들의 시간표야 값없이 흘러가는 법이 없지만, 오히려 놀라운 것은 감옥 밖의 변화다. 1980년대라는 변혁운동의 놀라운 소용돌이에서 박석률은 격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1990년대 초반까지도 일반적인 민주화운동자와 ‘지하조직 사건’은 여전히 달랐다.
박석률의 출소 이후 활동은 꾸준하고 전투적인 것이었지만 이미 장성해버린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그리고 재야운동에서 그의 자리는 넓지 않았다. 남민전은 변혁운동의 세대교체 과정에서 구세대와 신세대의 연결고리였는데, 감옥에 갇힌 이들이 돌아왔을 때 이미 운동은 신세대의 몫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박석률의 전투적 사고와 행동은 여전하다. 그는 오늘도 국제정세를 연구하고 통일운동과 진보정당운동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광우병 반대 촛불이 서울 중심부를 연일 채우던 어느날 기자를 만난 박석률의 첫마디는 “전술이 없어, 전술이”였다. 이명박 정부가 쌓아놓은 이른바 ‘명박산성’앞에서 몇 만명이 끝장을 볼 생각으로 드러누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박석률은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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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석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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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 말
월간『말』은 3월 호 ‘인물이야기’에서 남민전의 중앙위원을 지냈던 안재구를 소개한 바 있다. 안재구가 해방 이전부터의 좌익운동에 연결되어 있었던 인물이라면, 이번 호에서 소개하는 박석률은 다음 세대의 대표적 인물에 속한다.
‘먹물 배신자’는 되기 싫다
박석률은 전남에서 태어나 광주 서중과 경기고등학교를 나왔다. 중고등학교 입시가 있던 시절이니 명문 중의 명문인데다가, 대학생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니 이미 ‘준’ 지식인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박석률은 지식에 대한 애착이 강한 편은 아니었다. 임꺽정의 서림같은 ‘먹물 배신자’가 되기 싫었던 것이다. 실천을 중시하는 그의 기풍은 이 시절 즈음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1966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입시에 실패한 박석률은 후기 대학을 다니면서 데모로 날을 지샜다. 그러다가 다시 시험을 보고 1970년에 서강대학교에 입학했는데, 당시 서강대 학생운동 진영으로서는 ‘선배급’ 활동가가 갑자기 나타난 셈이 되었다. 서강대는 서울지역에서 비교적 조용한 학교였는데 1973년 말에서 1974년 초에는 학생운동이 특히 활발했다. 서강대는 1974년의 첫 시위를 터뜨리면서 민청학련 사건에 끌려들어간다. 같은 대학 71학번인 김선택이 서울대나 고대 학생들과 교류를 갖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시위 계획을 공유한다든지 정기적 모임을 갖는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유신 반대 세력을 일망타진하려했던 박정희 정권은 권오성, 김윤 등과 함께 박석률을 잡아들인다. 이들은 긴급조치 4호가 발표되기 이전에 잡혀갔는데도, 긴급조치 4호에 의해 재판을 받았다. 이 재판에서 7년형을 선고받은 박석률은 10개월만에 출소한다. 학생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형량 인플레이션이 심하던 시절이니 특이할 것도 없었다. 민청학련 사건은 대규모 ‘빵잽이’를 배출함으로써 정권의 의도와는 반대로 직업적인 활동가들을 대량 생산한 결과를 빚는다. 박석률 역시 얼마안가 남민전에 가입함으로써 자신의 혁명활동을 ‘업그레이드’했다.
이 업그레이드는 어떤 의미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박석률의 주장처럼 “박정희 유신통치에 대항할 수 있는 길이라고는 통째로 잡아가라고 조직성원을 공개하지 않는 방법 이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한번으로 끝나는 투쟁이 아닌데, 지속적으로 투쟁하여 이기기 위해서는 조직성원이 이름만 올린 그 자체로 예비구금 당하거나, 한사람도 남김없이 잡혀가서야 어떻게 되겠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남민전준비위라는 조직도 비공개 지하조직화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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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민전 사건 관련자들과 함께. 오른쪽 맨 앞이 박석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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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운동은 결국 그 결과가 증명한다”
다시 민청학련으로 돌아가서,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 배후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터뜨리고 그 지도부 8인에 대해 사형을 집행한다. 한국 사법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기억되는 이 ‘법살(法殺)’은 공포와 증오를 동시에 키웠다. 박석률은 남민전 사건 당시에 “인혁보다 두 배는 죽을 줄 알았다”고 했으니, 이 시대에 비합법 전위조직에 가입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남민전은 이재문(옥사), 신향식(사형), 안재구(무기) 등이 중앙위원회를 구성했고 궁극적으로 전위정당과 전선체의 결성을 목표로 한 준비조직이었다. 그러나 박석률은 남민전에 대한 지나친 평가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흔히 떠올리게 되는 상하간의 엄격한 지도가 있는 정연한 조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에게 남민전은 “목숨을 걸고 같이 싸우는 의미”로서의 ‘조직’이었던 것이다. “한 명이 그만 두려면 서로를 죽여야 하는” 비합법 운동에서 박석률은 남민전의 선언이나 투쟁 방식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은 상태에서도 조직활동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석률은 조직사업에 수완을 발휘했다. 그를 취조한 검사가 ‘검거된 84명 중에서 9분의1이 당신이 조직한 사람’이라고 공박했는데, 이를 놓고 박석률은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안했으면 내가 그렇게나 많은 비중을 차지했을까” 의아했다고 한다.
남민전이 탄압을 받아 완전히 와해된 것에 대해 박석률의 시각은 차갑다. “제대로 했으면 조직이 그렇게 다 털렸겠는가. 조직운동은 결국 그 결과가 증명한다”는 것이다. 사형을 받았거나 옥사한 선배들, 그리고 석방 이후에도 변혁운동에 나섰던 몇몇을 제외하면 “존경하는 선배가 거의 없다”는 말도 했다. 이는 박석률의 운동에 대한 태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민주화운동에 따른 수감경력이 ‘훈장’처럼 받아들여지는 시대에도 박석률에게는 스스로를 보호하는 데 무능했던 남민전 ‘사건’이 아름답거나 자랑스러운 기억으로만 남아있지는 않다.
군사정권도 바보는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자신을 공격했던 이들에 대해 정권은 목숨을 요구했다. 이른바 ‘긴쪼’(긴급조치)시대에도 교정에서 돌 몇 번 던진 이들에게는 많아야 3년이었지만, 남민전 성원에게는 깎고 또 깎아도 10년 가까운 수감생활이 돌아갔다. 박석률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88년 12월 형집행정지로 나오기까지 9년을 감옥안에서 ‘썩었다’. 사회와 격리된 시간이 길면 길수록 복귀에는 더 많은 시간이 들어간다. 아무리 감옥이 ‘혁명의 학교’라고 하더라도 감옥은 감옥인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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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옥에서 막 나온 박석률. 한 계간지의 좌담에 참석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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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전에는 유명 인사가 많다. 현 정부의 실세 중 하나로 불리는 이재오 전 한나라당 의원이 그렇고, 홍세화 한겨레신문 기획위원,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권오헌 양심수후원회장, 이수일 전 전교조위원장, 김남주 시인 등이 남민전의 ‘전사’였다. 남민전의 구성원을 ‘전사’로 부르는 것은 이들이 일종의 외곽조직인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이하 민투)를 조직한 것과 연관이 있다. 민투의 성원은 ‘투사’, 남민전의 성원은 ‘전사’가 된다.
박석률이 남민전에 끌어들인 사람이 홍세화다. 홍세화는 사건 당시 회사 일로 프랑스에 있었는데, 그에게 국제 전화를 걸어 도피를 지시한 사람도 박석률이다. 박석률은 홍세화가 영구 귀국한 2001년 이후에도 막역한 사이로 지낸다. 김남주도 박석률이 끌어들였다. 김남주도 광주 서중을 나왔으니 동문이기도 하고, 광주를 떠나 서울로 왔을 때 뒤를 봐준 사람이 박석률이었다. 박석률도 시를 쓰니 여러모로 잘 어울렸을 것이다. 그러나 박석률의 평가는 ‘짜다’.
“원래 글 쓰는 사람들은 잘 안 믿는다. 최남선이나 이광수나 그 재주를 가지고도 결국 다 배신하지 않았냐. 문약(文弱)은 가장 경계하는 바다. 김남주도 절반만 믿는다. 그는 결국 동구 사회주의 몰락하고 속병나서 죽었다. 동구 몰락한 것과 우리가 무슨 관계란 말인가? 교훈을 찾으면 될 일이지 속병나 죽을 일이 아니다.” 목숨을 함께 걸었던 동지가 아니라면 쉽게 하기 어려울 정도로 냉정하다.
박석률이 ‘먹어주는’ 지식인이라면 고 조영래 변호사 정도다. 대구 출생으로 경기고등학교 동창이 되는 그에 대해서만큼은 “똑똑하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조영래는 경기고등학교 시절부터 데모에 앞장섰는데, 박석률은 “맨날 데모만하면서 모의고사보면 꼭 1등을 했다”며 자랑스러워 했다. 조영래는 박석률이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법률적 조언을 주는 벗이었다.
남민전 사건에서 박석률의 동생인 박석삼도 연루된다. 석삼은 형과는 별도로 광주 지역을 근거로 활동했는데, 1978년의 함평고구마투쟁, 교육지표사건으로 당국의 주목을 받게되자 서울로 피신한다. 그는 전수진, 홍세화의 집에서 숨어살면서 청량리역 삐라살포 투쟁 등에 관여한다. 박석률은 검거되기 전까지 동생의 가입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두 형제는 각각 전주와 대전교도소에 갇히는 데 박석률은 정약용, 약전 형제의 고사를 들어 동생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석삼아! 남도(南道) 따라 가는 길! 그 길에는 네가 있는 전주가 있고, 가족들이 있는 광주가 있다. 그동안 소식 없어 못내 궁금하더니, 너의 편지 보고 새삼 생각나는구나. 19세기 초, 정약용 형제가 남도길을 따라, 나주 입구에서 헤어져 한쪽은 강진으로, 한쪽은 흑산도로 갈리던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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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사회문제연구소 소장 시절. 왼쪽의 가방을 둘러멘 이가 김남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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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주 시인의 아들과 어울리는 모습. 왼쪽의 여자아이는 박석률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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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소 직후 망월동을 찾아 참배하는 모습. 절을 하고 있는 사람이 박석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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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몰락에 담담할 수 있었던 이유
광주와 6월 항쟁을 감옥안에서 지켜본 박석률은 1988년 12월 22일 드디어 세상으로 돌아온다. 곧바로 망월동으로 가 큰 절을 올린 그는 전남사회문제연구소를 만들면서 다시 현실에 개입한다. 이 때쯤 그를 지켜보던 ‘어른’들에게 큰 문제는 결혼 문제였다. 가정을 차려야 자리를 잡을텐데, 이미 마흔이 넘은 ‘간첩’을 곱게 볼 처녀가 있을 리 없었다. 이런 문제를 잘 푸는 건 예나 지금이나 종교인들이다.
그가 1989년 초 문익환 목사를 찾았을 때다. 문 목사는 박석률에게 북에서 온 한 통의 편지를 보여줬다. “통일원에서 이 편지를 전해 받았어요. 날더러 가까운 시일 안에 평양으로 오라는 초청장이야. 어떻게들 생각해?” 참으로 빠르게 움직이던 시국이었다. 문 목사는 박석률에게 한 가지를 더 제안한다. “감옥에서 고생하고 나온 사람들은 한 10년 정도는 몸도 쉬고 건강도 살펴야 해. 내가 좋은 규수감이 있어 석률이한테 소개해 주려고 하니 기다려 봐.” 문 목사가 약속을 지킨 것은 몇 달 후, 문 목사의 부인인 박용길 장로가 한 여성을 소개한 것이다. 방북이라는 거사를 앞두고 까마득한 후배의 혼사까지 걱정했던 거인의 풍모였다. 그렇다고 끝까지 좋은 것은 아니다. 학창 시절부터 여자에게 인기가 없었던 박석률은 김남주가 소개한 여성과도 잘 안되고, 결국 진관 스님이 소개한 또 다른 처녀와 결혼을 한다.
박석률이 세상으로 복귀했던 1980년대 후반은 세계사적으로도 격동기였다. 이미 한차례 ‘페레스트로이카’ 논쟁이 지나갔지만, 연이은 동구권과 소련의 몰락은 큰 충격을 줬다. 그러나 이미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난 그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는 감옥안에서 3년간 ‘쌀뜨물만 먹고 살았다’. 췌장염을 앓았던 것이다.
감옥에서 무기수는 ‘전차’라는 은어로 불린다. 형기가 없으니 끊임없이 평행선을 그리며 달리는 철로위의 전차와 같다는 것이다. 그가 갇혀있던 대전교도소의 장기수 사동에는 살아서 걸어나간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직 스피커폰을 통해 교도관과의 의사소통만 가능했던 독거방에서 그는 시도때도 없이 ‘잠을 잤다’. 일종의 가사상태로 4~50일을 지내자 몸무게가 20Kg이상 빠졌다. 하루 밤에 소변을 100번 이상 볼 정도에 몸에 이상이 왔다.
“쌀뜨물만 먹고 죽을둥살둥 하면서 고민을 했다. 어차피 세상이 한 번 바뀌지 않고는 못 나갈텐데 과연 어떻게 될까? 그 때 내렸던 결론이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감옥 나와서 소련 망하고 동구권 망할 때 담담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가 정말로 힘들었던 건 1994년이었다. 그 해 벽두에 김남주가 세상을 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밤늦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박석률은 뉴스의 자막으로 흐르던 긴급뉴스에 큰 충격을 받았다. ‘문익환 목사 오늘 오후 급서’ 영결식을 치르던 날은 보기 드문 한파가 몰아닥쳤다. 그리고 뒤이은 통일운동 내부의 노선 논쟁과 세 번째의 감옥생활을 하게 만든 범민련 사건이 뒤따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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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구금생활은 청년을 중년으로 변하게 만든다. 혁명 투사들의 시간표야 값없이 흘러가는 법이 없지만, 오히려 놀라운 것은 감옥 밖의 변화다. 1980년대라는 변혁운동의 놀라운 소용돌이에서 박석률은 격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1990년대 초반까지도 일반적인 민주화운동자와 ‘지하조직 사건’은 여전히 달랐다.
박석률의 출소 이후 활동은 꾸준하고 전투적인 것이었지만 이미 장성해버린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그리고 재야운동에서 그의 자리는 넓지 않았다. 남민전은 변혁운동의 세대교체 과정에서 구세대와 신세대의 연결고리였는데, 감옥에 갇힌 이들이 돌아왔을 때 이미 운동은 신세대의 몫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박석률의 전투적 사고와 행동은 여전하다. 그는 오늘도 국제정세를 연구하고 통일운동과 진보정당운동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광우병 반대 촛불이 서울 중심부를 연일 채우던 어느날 기자를 만난 박석률의 첫마디는 “전술이 없어, 전술이”였다. 이명박 정부가 쌓아놓은 이른바 ‘명박산성’앞에서 몇 만명이 끝장을 볼 생각으로 드러누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박석률은 청년이었다.
- ©월간 말
- 기사입력: 2008-06-23 13:50:13
- 최종편집: 2008-07-01 14:4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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