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향의 그늘, 사할린을 가다

[월간 말]

최준혁 IKN(지구촌동포연대) 사무국장

+ 글자크게 - 글자작게 글자 크기

검은 대륙, 사할린
사할린이라는 명칭은 ‘검은 강으로 들어가는 바위’라는 의미로서 몽골 타타르인들이 부른 명칭에서 유래한다. 러시아 대륙의 동부, 오호츠크 해에 있는 섬으로 하바롭스크 지방의 한 주(州)를 이루며, 북부에는 석유가, 남부에는 석탄이 풍부하다. 러일전쟁 후 사할린섬 남반부(북위 50도 이남지역)는 가라후토(華太)라는 일본 이름으로 불리며 일본 영토로 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가 점령하였다. 전체 인구는 약 55만 명에 100여 민족 이상이 살고 있으며, 그 중 한인이 5.4%(약 3만여 명)로 러시아인 다음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검은 대륙 사할린은 제정러시아시대에는 유형지였고, 검은 지하자원이 풍부한 땅이며, 일제시대에 수많은 조선인들이 끌려간 강제동원지였다.

망향의 언덕에서
모진 노동에 문드러진 손가락 잘려서 없어진 팔뚝,
멀쩡했던 몸뚱이가 이렇게 짓밟혔어도 꿈속의 고향길은 갈수록 생생합니다.
일본이 가르고, 소련이 묶어세운 고향길은 갈수록 꿈결에서 환해집니다.
얼어붙은 타향땅의 모진 세월에 몸뚱이의 상처도 깊고 크지만
밤마다 돌아눕는 고향 하늘쪽 그리움은 더욱더 깊고 큽니다.
윤주영 사진집 "동토의 민들레" 중에서


사할린의 주도인 유즈노사할린스크시 남쪽에 버스로 약 1시간 반 정도 소요되는 거리에 위치해 있는 코르사코시는 일본 홋카이도와는 약 4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으로 맑은 날에는 일본의 최북단인 홋카이도의 왓카나이시가 보인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과 함께 일본정부는 코르사코프항을 통해 일본인들을 본국으로 귀환시켰다. 일본인 처를 둔 조선인들을 제외한 모든 조선인들은 고향에 가기 위한 배를 기다리다가 1990년 한러 수교이전까지 돌아오지 못한 채 남게 된 아픈 역사를 지닌 곳이다.
세가지 이름, ‘명자’, ‘아끼꼬’, ‘쏘냐’①
1905년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포츠머스강화조약으로 북위 50도 이남의 남사할린을 차지하고, 이 지역의 군사적 가치와 자원이 풍부하다는 사실을 알고 각종 자원 확보에 노력을 기울이게 되면서 노동력이 크게 필요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인 노동력에 대한 필요성도 높아졌다. 아울러 일제 식민지 시기였던 1910년~1918년 기간 동안 조선에 대해 시행한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수많은 조선의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살 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갔으며 이 중에서 일본령이었던 북위 50도 이남의 남사할린(일본명 華太, 카라후토)으로도 조선인들이 이주하게 되었다. 초기의 조선인의 이주는 강제동원에 의한 것은 아니며 계약노동자 또는 농업으로 건너간 것이었다.
일본 정부가 남사할린지역의 탄광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진출한 1930년대부터 각종 전쟁으로 인해 부족해진 물자와 노동력 해결을 위해 1938년부터 일제는 국가총동원령을 제정, 강제동원 또는 강제징용을 위한 토대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시작된 강제동원으로 남사할린에도 조선인의 수가 급증하게 되었으며 남사할린에 이미 건너간 사람들에게도 국가총동원령이 적용되어 소위 ‘현지징용’② 되었다. 이 시기부터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은 사할린의 30여개 탄광과 수많은 벌목장을 포함하여 비행장, 도로 및 철도건설 등의 토목현장들까지 다양한 분야의 현장에서 노역에 시달렸다. 그 후 철도와 도로가 마련되자 1940년대에 들어서는 거대군수기업이 진출하면서 일본은 남사할린에서 채굴한 석탄을 수송선을 통해 일본으로 수송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반부에 연합군이 태평양에서의 제공권을 장악하여 남사할린과 일본을 오가던 일본 수송선의 피해가 늘어나게 되자, 결국 1944년 8월에는 수송선에 의한 일본으로의 석탄수송이 중단되었다. 다급해진 일제는 1944년 9월부터 남사할린지역에서 가동 중이던 전체 탄광 중 절반 이상의 탄광을 정리하고 조선인 노동자를 포함한 탄광노동자와 생산자재를 일본 본토로 긴급배치하였다. 이는 남사할린에서 일본으로의 수송이 불가능하게 되자 남사할린의 석탄을 포기하고 일본 본토의 석탄으로 전쟁을 수행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전환배치’ 또는 ‘이중징용’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일본 본토로 이중징용 당했던 조선인들은 후쿠오카현을 비롯한 4개현 26개 탄광으로 이중징용 되었다.
갑작스러운 이중징용으로 인해 발생한 비극은 사할린보다도 더욱 열악한 노동조건과 함께 이중징용 노동자 대부분이 가족을 남겨두고 떠나 전쟁이 끝난 후 지금까지도 연락두절과 생사불명 상태의 이산가족으로 지내 왔다는 사실이다.
종전 시 사할린에 억류된 조선인들의 절대다수는 현지징용을 포함한 강제동원과 이중징용의 직접적인 피해자이거나 그 가족들이었다. 정확한 자료를 가지고 있는 일본이 아직도 그 강제동원 및 전환배치와 관련된 각종 자료를 공개를 하지 않고 있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한 자료에 의하면 1941년까지는 남사할린에 15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반 광산노동자의 소위 전환배치에 의하여 10만 명의 조선인이 일본 본토로 끌려갔다고 한다.
종전 후, 일본의 본국으로의 긴급소개와 밀항 등을 통해 일본인들과 함께 소수의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1945년 8월 23일 소련군의 출국금지조치로 남아있던 일본인과 함께 약 4만3천여 명의 조선인이 사할린에 억류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전후처리 과정에서 이들 피억류자에 대한 송환문제에서 잔류 조선인들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모두 3단계로 나눌 수 있는 송환 중 1946년 12월 체결된 ‘소련지구송환 미-소 협정’을 통한 1단계 송환 시기(1946년 12월 ~ 1949년 7월)에서 귀환대상자는 일본인포로, 일반 일본인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잔류 조선인들은 송환되기를 원했었는데, 소련은 일본의 수용의사만 있었으면 조선인들을 함께 귀환시킬 용의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일본은 일본호적을 기준으로 하여 일인만 받아들였고, 일제 당시 조선호적으로 편제되어 있었던 조선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제시대 모든 조선인들이 일본국적이었듯이 종전 후까지도 일본국적이었던 사할린 조선인들이 1946년 일본국적을 상실한 것으로 취급한 것에 대해 일본정부는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따른 일본국적의 상실과 함께 1943년 카이로선언③의 의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당시 조선은 정부 수립 전인 미군정 시기로 이들을 보호할 국가의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사할린에 있던 조선인들은 일본으로도, 조국으로도 돌아가지 못하고 사할린에 남게 되었다. 그 후 3단계에서 일-소 수교를 통해 잔류 일본인들이 송환될 때 일인여자와 결혼한 조선인 남자 및 그 가족 약 1천500명이 귀환은 하였지만 결국 이렇게 해서 약 4만3천여 명의 조선인이 사할린에 남게 되었다.
1945년 8월 23일 출국금지조치 이후 소련 당국은 사할린 도민의 신분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일본인들은 일본국적자로 인정하였지만 조선인은 1938년 소련국적법④에 따라 무국적자로 처리하고 다만 신분증명서 뒷면에 ‘최종국적 일본’이라고 기록하였다. 귀환대상자에서도 철저히 배제되었고 무국적자로 남게 된 잔류 사할린조선인들은 종전 후 북한에서 사할린 노무자 파견과 함께 파견된 선전요원들의 권유로 소련 당국으로부터 북한국적을 취득하거나 소련국적을 취득하도록 강요를 받았다. 초기에는 많은 수의 조선인들 중 65%는 같은 민족인 북한국적을 취득하였으며 약 25%는 소련국적을 취득하였다. 특히 북한은 1963년과 1964년 사이에 사할린한인들에게 북한으로의 이주를 회유하여 많은 사할린한인들이 북한으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소련국적을 취득한 조선인들은 소련인들과 동일한 대우를 받고 싶었고, 또 생활수준의 향상과 가족의 안정을 위해선 소련 국적 취득이 불가피했기 때문이었다. 그후로 사할린조선인들은 소련국적을 취득하는 경향이 압도적으로 많아졌으며 현재는 대부분이 소련 해체 후 러시아국적을 갖고 있다.
한편 한국 또는 일본으로의 귀환을 기대하면서 무국적으로 남은 자들에게는 비공민으로 간주, 소련국적자인 공민과 달리 비공민에게는 여러 가지 차별과 함께 무국적자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고의로 증오하고 적성국인 일본이나 한국을 동경하는 위험분자로 판단,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아울러 1945년 사할린 주에 27개의 소학교(초등학교)가 생겨 아이들에게 우리의 말과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조선학교의 수와 학생수는 매년 증가하여 1963년 학생수가 약 7천200여 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1963년 5월 13일, 사할린 주 행정부 결정에 의하여 조선학교 폐쇄령이 내려지고 1964년에는 조선학교는 전혀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1990년, 한·소 수교 이래 사할린한인들의 요망사항인 우리말 교육은 사할린 주 교육부가 담당하는 교육제도를 통해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받아들여져 1988~89학년도부터 우리말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2007년에는 사할린주 11개 학교에서 13명의 교사들이 약 1천 명의 학생들을 교육 중이다.

60년만의 귀향 그러나 또다른 이산의 아픔
1987년, 일본에서 일본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사할린잔류한국겵떼굼菅??의원간담회’가 발족을 했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인만을 귀국시켰던 일본 정부가 사할린한인들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인정하고 남겨진 조선인에 대한 귀국조치를 취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정부와 한국정부는 양국의 적십자사를 통해 재정을 지원하여 1세들의 일시적인 모국방문을 시작으로 1992년부터 본격적인 영주귀국사업이 추진되었다. 이를 통해 1세 한인들의 평생의 꿈이었던 고향방문과 친척방문이 실현되었으며 2007년까지 7개 시설에 약 2천2백여 명의 1세들이 영주귀국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영주귀국의 조건⑤에는 가족을 동반할 수 없다는 항목이 있어 자식들을 사할린에 두고 혼자만 와야 하는 이산의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또한 2인 1세대를 이루어야하므로 부부 이외의 사람들은 낯설은 사람과 짝을 이루어 한 집에 살아야만 한다. 가족과의 생이별, 낯설은 이와의 동거는 고향땅에서 살게 되었다는 기쁨보다 외로움과 불편함을 크게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마저도 2009년을 마지막으로 영주귀국사업이 종료되는 상황이다.

역사회복의 희망을 찾아
일제강점기에 모집, 관알선, 징용 등에 의해 사할린으로 가게 된 조선인들은 해방 전에는 일본국적으로, 해방 후에는 무국적으로 그리고 지금은 러시아국적으로 살고 있다. 이는 사할린한인들의 자의가 아닌 일본정부의 배제와 구소련정부의 방조, 그리고 한국정부의 무관심 및 일방적인 일본정부의 책임전가, 해방과 정부 수립시기의 혼란과 그 와중에 주변국과 접촉할 수 없었다는 변명 등에 기인한다.
현재, 일본적십자사의 도움을 받아 일부 동포들에 대한 영주귀국사업을 벌이고는 있지만 사할린한인의 희망과는 사실 괴리가 있다. 또한 역사적 책임을 가장 크게 가지고 있는 일본정부는 적십자를 통한 금전적 지원만으로 모든 책임을 다한 양 진정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또한 영주귀국대상자 선정에 있어서의 불합리함과 천편일률적인 사업방식으로 인해 평생의 한과 꿈이었던 영주귀국을 반길 수 만은 없는 것이 사할린한인들의 현 상황이다. 당사자의 편에 서서 추진되지 않는 이러한 형식적인 사업으로 인해 보상은 커녕 또 다시 소외와 배제, 이별을 강요당하고 있다.
영주귀국만이 사할린한인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아닐 것이다. 물론 영주귀국문제의 해결은 중요하지만 영주귀국이 1세들의 과거의 문제라고 한다면, 사할린의 주도(州都)인 유즈노사할린스크시 이외의 지역에서 영주귀국도 하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고 있는 1세들의 생활은 바로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들 대부분은 광산노동자였으나 폐광으로 인한 경제활동의 정지 그리고 급격한 물가상승과 고령으로 인한 노동력 저하와 지원책의 미비로 인해 경제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영주귀국사업 이외의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실태조사와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지 않은 현실이다
또한 교육과 문화의 측면에서는 1963년 사할린주 행정부의 조선학교 폐쇄 결정 이후 단절된 민족문화교육의 맥을 잇고 있으나 우리말 교육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교사 확보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그 결과 질 높은 한국어교육이 이루어지기 힘든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교사의 부족현상은 그만큼 한인 청년들의 민족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 이는 사할린한인으로서의 역사인식의 부재와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올해 7월29일부터 8월3일까지 러시아 사할린에서 KIN(지구촌동포연대) 주최로 일제 식민지시기 강제동원의 그늘이 현재까지도 드리워져있는 동포사회의 역사와 현재를 직접 체험하고, 사할린동포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국내 시민활동가와 시민, 세계 각국 재외동포 및 사할린 현지동포들과 함께하는 제5회 재외동포NGO대회가 열린다.
비록 작은 출발이고 시작이지만 강제동원 70년, 눈물도 믿지 않는다는 사할린에서 사할린한인들의 문제와 해결방안을 마련하고 잊혀진 역사를 복원함과 함께 사할린한인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대회가 되기를 바란다.

  • ① 아끼꼬, 쏘냐는 각각 ‘명자(明子)’의 일본식, 소련식 이름이다. 식민지시대의 아픔을 한 사람의 이름의 변천으로 나타낸 것으로 영화 <명자, 아끼꼬, 쏘냐>의 제목을 따온 것이다.
    ② 일제는 이미 1929년 <노동자원조사법>을 제정하였고, 1938년 4월 1일에는 <국가총동원법(법률 제55호)>을 제정하여 국가총동원체제에 돌입하여 노동력에 대한 전반적인 국가관리를 실시하였다. 이 국가총동원법은 그 시행에 관한 부칙에 의하여 1938년 5월 4일 <국가총동원법을 조선, 대만 및 화태에 시행하는 건(칙령 제316호)>을 제정하여 5월 5일부터 시행함으로써 반도의 조선인을 강제동원함은 물론 화태(남사할린)의 조선인도 현지징용으로 강제동원하였다.
    ③ 1943년 11월 카이로선언에서 “일본은 폭력과 탐욕에 의하여 약취(略取)한 모든 다른 지역으로부터 축출될 것이다”, “3대국은 조선 민중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이 자유롭게 되고 독립하게 될 것을 결의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에 이은 포츠담선언 제8항에 “카이로선언의 모든 조항은 이행될 것이다”고 되어 있으며, 이를 수락한 1945년 8월 15일부터 일본은 이에 따를 의무를 지닌다.
    ④ 1938년에 개정된 소련국적법 제8조 “소련 영토내에 거주하는 자로서 이 법에 의하여 소련 공민이 아니면서 자신과 외국국적과의 관계에 대한 증명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무국적자로 간주한다.”
    ⑤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사할린으로 이주 또는 사할린에서 출생한 자, 러시아국적 또는 무국적자, 고령자, 무자녀 또는 독립세대를 구성하고 있는 자, 정신적 또는 전염성 질환이 없는 자, 지역구분 없이 2인 연령을 합산한 고령자 우선 (적십자사)


컨텐트 링크

민중의소리를 후원하시려면 아래 링크를 클릭하십시오.

컨텐트 링크를 불러오고 있습니다...

기사에 달린 댓글을 불러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