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팔타쿠스와 촛불시위
[월간 말]김태형의 마음방정식
한국의 미래를 환하게 밝혀주는 촛불시위를 보는 내 머릿속에는 불현듯 기원전 73년 고대 로마를 뒤흔들었던 스팔타쿠스(SPARTACUS)의 봉기가 떠올랐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1960)나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의 공연으로 잘 알려져 있듯이 스팔타쿠스는 노예제국가였던 로마제국의 검투노예였다. 그래서 스팔타쿠스를 비롯한 검투노예들은 노예주와 상류층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살인무기를 들고 상대방을 죽이기 위해 처절하게 싸워야만 했다. 이러한 잔인무도한 경쟁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극소수의 노예들은 노예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고 어느 정도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경쟁에서 낙오된 절대다수의 노예들은 참혹하고 무가치한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그 결과 노예들은 로또복권에 당첨될 확률과 비슷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싸워야 했고 동료노예의 목에 칼을 들이대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노예들이 ‘정치적 무관심’에서 벗어나기 전까지는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은 전혀 개선될 수 없었기에 그들은 서로를 적대시하며 아등바등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야만 했다. 그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며 ‘격투연습’에 몰두하기도 했고 허무한 인생이니 마음껏 즐기다 가겠다며 술과 여자에 빠져 최대한의 쾌락을 즐기기도 했다. 그들의 인생에는 이 두 가지 - ‘경쟁에서의 승리’와 ‘쾌락주의’ - 외에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재 한국의 젊은이들이 처해있는 상황은 본질적으로 로마 검투노예들의 처지와 다를 바가 없다. 우리 청소년과 젊은이들에게 한국사회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경쟁에서 승리해 출세하기 위해 친구들과 싸울 것을 강요해왔다. 그 결과 젊은이들은 친구를 꺾기 위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했고 밤늦게까지 학원을 전전해야만 했다. 즉 그들은 세상에서 낙오되지 않으려고 그렇게나 아름다운, 아니 아름다워야만 하는 유년기와 청소년기, 청년기를 송두리째 ‘격투연습’에 다 바친 것이다. 아마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IMF 위기가 휩쓸고 지나가면서 우리 젊은이들이 ‘경쟁에서의 승리’와 ‘쾌락주의’만을 쫓으며 ‘정치적 무관심’을 강하게 드러낸 것은. 그러나 젊은이들이 정치적 무관심에 빠져들면 들수록 그들은 노예의 운명, 88만 원짜리 인생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갔고, 한국의 노예주들은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탈정치화된 대중을 자기 입맛에 맞게 요리하며 서로 싸우게 만들어왔다. 여기까지가 봉기가 일어나기 전 로마의 노예들, 촛불시위가 시작되기 전의 한국 젊은이들에게 강요된 공통의 숙명이었다.
그런데 칼싸움 연습과 쾌락에만 탐닉하던 로마의 노예들은 서서히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왜 우리가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거지?”, “왜 우린 이런 비참한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 거지?” 그리고 마침내 깨닫기 시작했다. 노예들끼리 싸우기를 원하고 그것을 보며 즐거워하던 노예주들이 바로 그들의 삶을 난도질한 원흉임을. 노예주들이 노예들을 정치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한 자신들에게 행복한 미래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그리하여 노예들은 오랜 기간의 ‘정치적 무관심’에서 벗어나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서로의 목을 겨누었던 칼끝을 노예주에게로 돌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노예임을 아는 그 순간부터 그는 이미 노예가 아니다’라는 말처럼 누구에게 칼끝을 돌려야 하는지를 알게 된 그들은 이미 노예가 아니었다. 스팔타쿠스와 노예봉기자들은 자기 운명의 개척자요, 압박받는 로마 민중의 해방자요, 미래의 희망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 때문이다. 단지 70여 명으로 시작한 검투노예들의 봉기가 전 로마를 휩쓸고 결국 노예제의 붕괴까지 불러올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스팔타구스 노예전쟁(The Spartacus Slave War)에 오늘의 한국을 비유해보면 어떨까. 국민들끼리의 검투를 강요하던 현 정권은 안 그래도 잔인한 무한경쟁 속에서 심신이 병들어가던 국민들에게 광우병의심 쇠고기까지 먹이려고 했다. 그러자 70여 명의 검투노예들이 그랬던 것처럼 묵묵히 학교에서 예비 검투사가 될 준비만 하던 청소년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70여 명의 검투노예들 주위에 로마 민중이 뭉쳤던 것처럼 청소년들이 치켜든 촛불을 지키기 위해 한국의 각계각층이 궐기했다.
우리 아이들의 가녀린 촛불 정도면 충분했던 것일까? 그 촛불은 국민들을 잠에서 깨어나게 했다. ‘누가 우리들을 서로 죽고 죽여야만 하는 잔인한 싸움터로 내몰고 있는가?’, ‘우리가 서로 싸우기를 원하고 그것으로 이득을 보는 자들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는 모두가 촛불을 켜며 미국과 특권층을 향해 힘차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이제 우리끼리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다.’, ‘죄 없고 힘없는 서로에게 겨눠야만 했던 칼끝을 너희들에게 돌리겠다.’라고.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정치적 무관심만큼 해로운 것도 없다. 정치는 국민의 삶과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에 무관심한 국민이 많을수록 그들의 운명은 극소수의 반민족적이고 반민중적인 특권층에게 농락당할 위험성이 커진다. 반대로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므로 그런 국민들이 많아질수록 제대로 된 정치가 꽃 피어날 수 있다. 위기 때마다 한국의 독립과 민주화를 지켜내고 역사를 이끌어온 것은 바로 정치적으로 각성된 민중의 힘이 아니었던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촛불시위가 가진 집단적 치유의 힘에 대해서이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가련한 인생을 살아야만 했던 로마의 노예들은 분명히 수많은 정신질환에 시달렸을 것이다. 극단적인 죽음의 공포로 인해 정신분열증에도 걸렸을 테고 벌레만도 못한 자신의 처지로 인해 우울증도 심하게 앓았을 것이다. 또한 자기 인생을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에 빠져 노예주에게 의존하는 노예의식도 가졌을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프로이트가 직접 나서 그들을 치료한다고 해서 그들의 정신적 고통, 마음의 병이 치료될 수 있었을까? 아마 그들의 병은 스팔타쿠스의 봉기에 참여함으로써만 치료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그 어떤 능력 있는 심리치료자도 하지 못한 집단적 치유를 촛불시위가 해주리라 기대한다. 이 긍정적인 효과를 어찌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는가?(혹시 환산을 해보고 싶다면 심리치료 면담료가 보통 한 시간에 최소 10만원 정도임을 참조하시라)
‘공부해서 남주냐.’처럼 ‘촛불시위 해서 남주냐.’라는 말도 가능하다. 4.19혁명과 광주민중항쟁, 6월민주항쟁의 경험이 고스란히 국민들 속에 살아남아 오늘날의 촛불시위로 이어지듯이 오늘의 촛불도 우리의 내일을 환히 밝혀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현 정권이 폭압과 총칼로 거리의 촛불을 끌 수 있을지는 몰라도 국민들의 마음속에 어렵게 켜진 촛불만은 결코 끄지 못하리라. 2008년, 대한민국의 어둠을 걷어낸 촛불로 인해 우리의 어제와 내일은 결코 똑같지 않으리라. 우리 운명의 수호자이고 미래를 향한 희망, 촛불이여! 영원히 꺼지지 말라.
http://blog.hani.co.kr/saeddeul/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1960)나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의 공연으로 잘 알려져 있듯이 스팔타쿠스는 노예제국가였던 로마제국의 검투노예였다. 그래서 스팔타쿠스를 비롯한 검투노예들은 노예주와 상류층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살인무기를 들고 상대방을 죽이기 위해 처절하게 싸워야만 했다. 이러한 잔인무도한 경쟁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극소수의 노예들은 노예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고 어느 정도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경쟁에서 낙오된 절대다수의 노예들은 참혹하고 무가치한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그 결과 노예들은 로또복권에 당첨될 확률과 비슷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싸워야 했고 동료노예의 목에 칼을 들이대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노예들이 ‘정치적 무관심’에서 벗어나기 전까지는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은 전혀 개선될 수 없었기에 그들은 서로를 적대시하며 아등바등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야만 했다. 그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며 ‘격투연습’에 몰두하기도 했고 허무한 인생이니 마음껏 즐기다 가겠다며 술과 여자에 빠져 최대한의 쾌락을 즐기기도 했다. 그들의 인생에는 이 두 가지 - ‘경쟁에서의 승리’와 ‘쾌락주의’ - 외에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재 한국의 젊은이들이 처해있는 상황은 본질적으로 로마 검투노예들의 처지와 다를 바가 없다. 우리 청소년과 젊은이들에게 한국사회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경쟁에서 승리해 출세하기 위해 친구들과 싸울 것을 강요해왔다. 그 결과 젊은이들은 친구를 꺾기 위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했고 밤늦게까지 학원을 전전해야만 했다. 즉 그들은 세상에서 낙오되지 않으려고 그렇게나 아름다운, 아니 아름다워야만 하는 유년기와 청소년기, 청년기를 송두리째 ‘격투연습’에 다 바친 것이다. 아마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IMF 위기가 휩쓸고 지나가면서 우리 젊은이들이 ‘경쟁에서의 승리’와 ‘쾌락주의’만을 쫓으며 ‘정치적 무관심’을 강하게 드러낸 것은. 그러나 젊은이들이 정치적 무관심에 빠져들면 들수록 그들은 노예의 운명, 88만 원짜리 인생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갔고, 한국의 노예주들은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탈정치화된 대중을 자기 입맛에 맞게 요리하며 서로 싸우게 만들어왔다. 여기까지가 봉기가 일어나기 전 로마의 노예들, 촛불시위가 시작되기 전의 한국 젊은이들에게 강요된 공통의 숙명이었다.
그런데 칼싸움 연습과 쾌락에만 탐닉하던 로마의 노예들은 서서히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왜 우리가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거지?”, “왜 우린 이런 비참한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 거지?” 그리고 마침내 깨닫기 시작했다. 노예들끼리 싸우기를 원하고 그것을 보며 즐거워하던 노예주들이 바로 그들의 삶을 난도질한 원흉임을. 노예주들이 노예들을 정치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한 자신들에게 행복한 미래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그리하여 노예들은 오랜 기간의 ‘정치적 무관심’에서 벗어나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서로의 목을 겨누었던 칼끝을 노예주에게로 돌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노예임을 아는 그 순간부터 그는 이미 노예가 아니다’라는 말처럼 누구에게 칼끝을 돌려야 하는지를 알게 된 그들은 이미 노예가 아니었다. 스팔타쿠스와 노예봉기자들은 자기 운명의 개척자요, 압박받는 로마 민중의 해방자요, 미래의 희망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 때문이다. 단지 70여 명으로 시작한 검투노예들의 봉기가 전 로마를 휩쓸고 결국 노예제의 붕괴까지 불러올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스팔타구스 노예전쟁(The Spartacus Slave War)에 오늘의 한국을 비유해보면 어떨까. 국민들끼리의 검투를 강요하던 현 정권은 안 그래도 잔인한 무한경쟁 속에서 심신이 병들어가던 국민들에게 광우병의심 쇠고기까지 먹이려고 했다. 그러자 70여 명의 검투노예들이 그랬던 것처럼 묵묵히 학교에서 예비 검투사가 될 준비만 하던 청소년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70여 명의 검투노예들 주위에 로마 민중이 뭉쳤던 것처럼 청소년들이 치켜든 촛불을 지키기 위해 한국의 각계각층이 궐기했다.
우리 아이들의 가녀린 촛불 정도면 충분했던 것일까? 그 촛불은 국민들을 잠에서 깨어나게 했다. ‘누가 우리들을 서로 죽고 죽여야만 하는 잔인한 싸움터로 내몰고 있는가?’, ‘우리가 서로 싸우기를 원하고 그것으로 이득을 보는 자들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는 모두가 촛불을 켜며 미국과 특권층을 향해 힘차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이제 우리끼리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다.’, ‘죄 없고 힘없는 서로에게 겨눠야만 했던 칼끝을 너희들에게 돌리겠다.’라고.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정치적 무관심만큼 해로운 것도 없다. 정치는 국민의 삶과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에 무관심한 국민이 많을수록 그들의 운명은 극소수의 반민족적이고 반민중적인 특권층에게 농락당할 위험성이 커진다. 반대로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므로 그런 국민들이 많아질수록 제대로 된 정치가 꽃 피어날 수 있다. 위기 때마다 한국의 독립과 민주화를 지켜내고 역사를 이끌어온 것은 바로 정치적으로 각성된 민중의 힘이 아니었던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촛불시위가 가진 집단적 치유의 힘에 대해서이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가련한 인생을 살아야만 했던 로마의 노예들은 분명히 수많은 정신질환에 시달렸을 것이다. 극단적인 죽음의 공포로 인해 정신분열증에도 걸렸을 테고 벌레만도 못한 자신의 처지로 인해 우울증도 심하게 앓았을 것이다. 또한 자기 인생을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에 빠져 노예주에게 의존하는 노예의식도 가졌을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프로이트가 직접 나서 그들을 치료한다고 해서 그들의 정신적 고통, 마음의 병이 치료될 수 있었을까? 아마 그들의 병은 스팔타쿠스의 봉기에 참여함으로써만 치료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그 어떤 능력 있는 심리치료자도 하지 못한 집단적 치유를 촛불시위가 해주리라 기대한다. 이 긍정적인 효과를 어찌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는가?(혹시 환산을 해보고 싶다면 심리치료 면담료가 보통 한 시간에 최소 10만원 정도임을 참조하시라)
‘공부해서 남주냐.’처럼 ‘촛불시위 해서 남주냐.’라는 말도 가능하다. 4.19혁명과 광주민중항쟁, 6월민주항쟁의 경험이 고스란히 국민들 속에 살아남아 오늘날의 촛불시위로 이어지듯이 오늘의 촛불도 우리의 내일을 환히 밝혀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현 정권이 폭압과 총칼로 거리의 촛불을 끌 수 있을지는 몰라도 국민들의 마음속에 어렵게 켜진 촛불만은 결코 끄지 못하리라. 2008년, 대한민국의 어둠을 걷어낸 촛불로 인해 우리의 어제와 내일은 결코 똑같지 않으리라. 우리 운명의 수호자이고 미래를 향한 희망, 촛불이여! 영원히 꺼지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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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의소리
- 기사입력: 2008-06-30 17:21:54
- 최종편집: 2008-07-01 20: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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