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폭격에 죽어간 4백 원혼 한 달래

[월간 말] 57년만에 진실규명 곡계굴 사건

정웅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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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계굴

월간『말』은 99년 11월호 특집 ‘노근리의 승리, 그러나 제2의 노근리들이 울고있다’ 기사에서 1951년 1월 20일 미군 폭격에 의해 죽어간 충북 영춘 곡계굴의 4백 원혼들에 대해 다룬 바 있다. 무고한 민간인들이 억울하게 죽어간지 57년만에 원혼과 유족들의 한을 달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조사를 마치고 진실규명을 위한 행정처리 절차만을 남겨 놓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사건의 몇 명 안 되는 생존자 중 한 명인 엄한원(74) 옹은 “아직 진실규명 결정 통보를 받지 못해 담담하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진실규명 결정을 앞두고 『말』은 9년 만에 다시 곡계굴을 찾았다.

곡계굴이 있는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2리 느티마을. 단양에서 버스를 타고 30여 분을 더 들어가야 나오는 산골 마을이다. 곡계굴은 마을 가운데 난 도로를 따라가다 만나는 야산 아래 위치해 있다. ‘곡계굴 이곳에서부터 150미터’란 표석을 확인하고 논길을 따라가다보니 길이 뚝 끊겼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잡풀들로 길이 덮여 있었다. 잡풀을 헤치고 10여 미터를 들어가니 수 십개의 만장 깃발이 가지런히 세워져 있다. 억울한 원혼을 달래기 위해 만장에 새긴 글귀를 눈에 넣으며 눈길을 옮기니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곡계굴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입구에는 자물쇠가 달린 철문이 설치돼 있어 평소 출입을 통제함을 알 수 있었다. 입구 위로는 ‘곡계굴 희생자 제57주기 합동위령제. 2008. 1. 19. 11시, 곡계굴유족대책위원회’라 쓰인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굴 주변의 수 십개의 만장은 합동위령제 때 세워진 것이었다.

민간인 피란처에 미군 폭격
곡계굴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951년 1.4후퇴를 전후로 영춘은 인민군과 연합군이 일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던 지역이었다. 그 와중에 영춘면의 주택은 대부분 불에 타고 피란민들도 큰 화를 당했다. “마을에 폭탄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피란을 나갔지. 그런데 못 나가게 된 거라. 결국 갈 곳은 없고 안전한 곳을 찾다보니 곡계굴로 들어간거지. 굴에서 10여 일을 생활을 했어요. 우리 표현으로는 아군이지 미군을 아군이라고 하잖아요. 미군 비행기가 2∼3일을 정찰을 하더라구. 그러다가 (1951년 1월) 21일 오전 10시 반인가 정찰기 한 대가 곡계굴 주변을 낮게 정찰하더니, 바로 쌕쌕이 4대가 날아와서 굴 입구에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사격을 해댔어.” 당시 굴안에서 피란생활을 하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엄한원 옹의 말이다. 그는 “미군이 네이팜탄을 투하한 것 같아. 네이팜탄 가스가 굴 안으로 들어와서 당시 굴 안에 있던 300여 명의 대부분이 질식사했어. 나는 폭격 시작되고 10분 만에 안에서 질식사하느니 차라리 총에 맞아 죽겠다고 뛰어나갔는데 운 좋게 살아났지”라며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전했다. 함 옹은 당시 일가족 7명과 함께 굴 속에서 피란중이었는데 가까스로 빠져나온 그를 제외하곤 모두 굴 안에서 죽었다. 그의 가족들 중 살아남은 이는 외지로 피란나갔던 형과 그, 둘 뿐이다.

“그 때 얼마나 시체가 많았는지 면사무소에서 인부 다섯명을 샀다. 굴에서 썩어있는 무연고 시체를 수습해 인근 산에다 대강 묻는 일을 그들이 했다. 하도 시체가 많아서 다섯명이서 근 한 달간 그 일을 했다.”
당시 면사무소에서 일을 했고 이후 면장까지 지낸 조태훈 씨(76)의 말이다. 그의 아버지와 여동생도 그 굴에서 죽었다.
김옥이 씨(74)는 당시 굴에는 없었지만 미군기의 폭격장면을 거리를 두고 직접 목격한 사람이다.
“우리 애아버지 조일원 씨(83)도 거기에 들어가 있어서 내가 기억이 잘 나는데··· 폭격 있기 하루 전에 피란민들이 굴에서 나오는데 한 3,4백 명은 족히 됐다. 그 굴속에 20여 일을 갇혀 있었는데 폭격이 뜸하니까 이젠 나가자 해서 각자 자기 동네로 가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또 폭격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서 다시 모두들 그 굴로 들어갔다. 그러자마자 미군 정찰기가 와서 정찰을 하고 가더니 30분쯤 있으니까 또 다른 비행기가 와서 폭격을 해댔다. 나는 그 때 밭을 메고 있었는데 그 일을 내가 다 지켜봤다.”
-99년 11월호 『말』, ‘제2의 노근리- 충북 영춘 곡계굴의 4백 원혼’ 기사 중 인용-


엄 옹은 이날 오전 10시반 시작된 폭격이 오후 3, 4시까지 계속됐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미군은 왜 민간인들이 피란해 있는 곳에 폭격을 했을까? 굴속에 피란해 있는 주민들을 인민군으로 오해한 것 같다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엄 옹은 “마을에 있던 인민군들은 폭격이 있기 하루 이틀 전에 다 후퇴해 갔다”라고 말했다.

가슴에 한 말도 못하고
수십년 동안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유족들의 가슴에 한으로만 남아있던 곡계굴 사건은 단양군이 발행한 허술한 단양군지와 이를 바로잡으려는 향토사학자 우계홍 씨(1999년 사망)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1990년 12월 15일자로 발행된 단양군지 187쪽엔 단양의 해방이후사가 적혀 있다.
곡계굴 입구

죽령터널 열차사고(1949. 8. 18), 인민군에 의한 단양경찰서 피습전소(1950. 7. 12), 폭우로 인한 대수해(1972.8) 등이 군내 3대 주요사건으로 실려 있다. 군지를 보고 우계홍 씨는 발행인측에 편지를 보냈다.

1990년 12월 15일자 발행 단양군지를 보고 편집인 제위와 발행인 측에 대하여 노고에 감사를 드리면서 편집후기에 “앞으로 미흡한 부분에 대하여는 지속적인 자료수집과 정리보존하여 차후 보완될 것으로 믿는다”하고 있으니 군 전체의 것을 망라, 장래 후인들에게 역사로서 꼭 필요한 것을 전하여 줌이 금인의 책임이라고 생각되어 여기에서 영춘의 몇가지만은 다음 기회에 넣어 편입되기를 바라서 제안함.
여기서 6.25 동란으로 인한 영춘의 전화(戰禍)를 서술함에 있어 혹은 이 전화는 어느 지역이든 다 겪지 않았느냐 하겠지만 이곳은 태백과 소백을 건너딛는 디딤롤의 지역적인 여건에서 당한 타(他)에 유례없는 큰 난리쟁건(亂離爭件)들 중에서 향토사상 기록되어야 할 것임을 믿어 이에 대강을 약기함.
1951년 1.4 후퇴 전후로 영춘을 중심으로 인민군과 연합군이 일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는데 그 와중에 영춘면의 주택은 대부분 불에 타버리고 피란민들도 큰 화를 당했음. 그때 각처에서 모여든 피란민들은 은신처를 찾아 상리(上里)에 있는 넓은 동굴(고깨굴)로 들어가 은거하고 있었는데 1951년 1월 20일 이를 인민군으로 오인한 연합군의 굴구(窟口) 폭격으로 굴속의 전원이 연소질식되어 참사 당하였다. 그후 신원이 판명된 인근에서 들어갔던 시체는 찾아냈으나 나머지 300여구의 시체들은 각지에서 피난왔던 신원불명의 임자없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민간인으로서는 전사상 유례없는 대변일 것이다. 그후 그해 3,4월 들어 치안이 회복된 후에도 이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 시체들은 그대로 갇힌 채 지금(至今)함은 실로 다시없는 처참한 일로 인생비운의 극치일까. 당시 전화중 혼란기라는 빙자도 할 수 있으나 사후대책도 받지 못했던 영혼들의 딱함과 억울함을 상상해보면서 ‘정감록’에 “태화산(太華山, 학살현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산-편집자 주) 하에 적시여산(積屍如山, 시체가 산처럼 쌓인다-편집자 주)”이란 예언의 기록이 그다지도 적중했음을 감탄해 마지 않는다. (하략)
-99년 11월호 『말』, ‘제2의 노근리- 충북 영춘 곡계굴의 4백 원혼’ 기사 중 인용-


그러나 우계홍 씨의 주장은 철저히 무시당했고, 충청일보가 우 씨가 단양군청에 보낸 편지 사본을 보관하고 있던 조태훈 씨를 취재해 1999년 10월 8일 기사를 내보내며 우 씨의 노력은 빛을 보게 됐다. 이에 앞서 1999년 9월 30일 AP 보도를 통해 노근리 사건도 알려졌다. 곡계굴 사건 유족들도 그해 유족회를 발족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보도가 나오고 우리도 용기를 냈지. 그 전에는 우리 가족들이 굴에서 희생됐다는 얘기도 못했지. 우리를 도와준 미군이 한 건데 혹시라도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고, 오해를 받으면 불이익을 당하잖아요.” 엄한원 옹의 말이다.
유족회를 발족하고 진실규명을 위해 노력한지 9년만에 곡계굴 사건 유족들은 다소나마 마음을 달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한국전 당시 미군의 공중폭격 사건은 150여 건에 이르고, 미군정 전후기(1945.8~1948.6)부터 한국전쟁때까지 미군사건만 전국적으로 509건에 이른다.(진실화해위원회 집단희생규명위원회 08. 3. 현재)
아직 우리는 더 많은 우리 과거의 진실과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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