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누 선주민족 결의’의 의미

[월간 말] 일본

정신혁 연세대 대학원 일본근현대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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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누족의 전통 문예공연

지난 6월 6일, 일본 중의원·참의원 양원은 ‘아이누 민족을 선주민족으로 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이하 아이누 선주민족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 결의문에서는, 작년 9월 일본을 포함한 143개국이 찬성한 가운데 발표된 UN 선주민 권리선언(United Nations Declaration on the Rights of Indigenous Peoples)의 취지에 부응해 “우리나라가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아이누인들이 법적으로는 동등한 국민이면서도 차별받고 궁핍을 강요당해온 역사적 사실을, 우리들은 엄숙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일본 정부는 일본열도 북부주변, 특히 북해도에 선주했으며 독자의 언어, 종교나 문화의 독자성을 갖는 선주민족으로서 아이누인을 인정할 것과, 전문가 회의를 신설해 아이누에 대한 종합적 시책을 확립할 것을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1986년 당시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수상이 국회에서 일본은 ‘단일민족국가’이며 현존인구가 수 만 명에 불과한 아이누 민족은 (일본 내의) 소수민족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등의 발언을 한 지 22년 만에 등장한 이 결의안은, 일본의 소수자운동사에 남을 만한 하나의 이정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불과 한 달 후 홋카이도의 도야코(洞爺湖)에서 열릴 G8 정상회담 직전에 발표된 이 결의안이 일본 국내의 다문화주의 정책에 대한 홍보효과를 겨냥한 포석임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채택된 결의안이 어떻게 실효성있는 관계법령의 신설이나 정비로 이어질 수 있을 지도 여전히 미지수다. 이러한 과제들을 목전에 둔 ‘아이누 선주민족 결의안’의 의의와 전망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그동안 아이누가 걸어온 길을 간략히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아이누족의 귀환
아이누는 원래 아이누어로 ‘인간’을 뜻하는 말이다. 홋카이도 뿐 아니라 혼슈 북부, 사할린, 쿠릴열도 등에 널리 거주해온 아이누는 주로 수렵·어로·목축 등에 종사해왔다. 또한 생활권역이 비슷한 니브히, 윌타 등의 소수민족들과 함께, 와진(和人, 전통 시대 일본인을 지칭한 말)이 진출하기 훨씬 이전부터 모피나 연어, 나중에는 고가 상품인 말린 해삼 등을 유통하는 ‘산탄(山丹, 아무르강 하류 지역을 가리킴) 교역망’을 구축해왔다.
이들의 땅, ‘아이누모시리(아이누어로 인간의 대지를 의미)’에서 아이누가 소수자의 위치로 밀려나면서 일본에 강제로 편입된 과정은 수 세기 이상을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이래 와진은 에미시·에조(蝦夷) 등으로 불린 혼슈 북방의 이민족과의 전투를 거치며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해갔다. 와진의 세력권이 혼슈를 넘어 홋카이도까지 팽창하면서, 1599년 이후로는 마쯔마에 번(松前藩)이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에조치(蝦夷地, 당시 일본에서 아이누의 활동 지역인 홋카이도·사할린·쿠릴 열도 등을 지칭한 말)의 지배권을 인정받게 된다. 마쯔마에 번은 남부 홋카이도에 일종의 교역소인 바쇼(場所)를 설치하고 특정 상인에게 세금을 납부하는 댓가로 현지에서의 교역을 허용했다. 그러나 이 교역은 호혜적인 거래라기보다는 불평등한 착취에 훨씬 더 가까웠다. ‘변경에서 바라본 근대’의 저자인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 교수 테사 모리스-스즈키의 지적대로, 일본인의 북방 진출은 이전부터 있었던 ‘산탄 교역망’의 경제적 이익을 침식하고 대량의 생선 및 금비(金肥, 청어 등의 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 농업용 비료로 활용되었음)를 획득하기 위한 일종의 ‘상업식민주의’적 팽창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착취’에 저항하여 1669년 홋카이도에서는 일본인 거류지를 대상으로 대규모 항쟁이 일어났다. 일본에서는 ‘샤크샤잉(지도자의 이름)의 봉기’로 알려진 이 항쟁은 화승총을 비롯한 화력의 우세를 등에 업은 와진에 의해 철저하게 진압되었다. 이어 18세기 중후반 이후 강화된 러시아의 남하 움직임에 대응하여, 1799년부터 1821년까지 도쿠가와 막부는 ‘에조치’를 직할령으로 편입했다.
이처럼 홋카이도와 아이누는, 머지않아 도래할 제국주의의 파도를 앞에 두고 일본의 일부로서 점차 포섭되어갔다. 이러한 과정은 근대국민국가의 핵심 구성요소인 명확한 국경과 ‘평등한 시민’을 구축하면서 그 경계의 안과 밖을 넘나들던 사람들을 국민/신민으로 재편성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페리 함대의 일본 진출을 계기로 일본이 대외 문호를 개방한 직후인 1855년, 막부는 마쯔마에 번에게 다시 ‘위임’했던 에조치를 직할령으로 개편하고 일본식 행정·교육을 시행했다. 러시아의 남하 저지 및 국경선 확정이 초미의 관심사였던 당시, ‘제국의 북문’ 홋카이도가 확고하게 ‘일본화’되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때, 외교 협상의 당사자는 일본과 러시아라는 두 국가로 한정되었다. 홋카이도에 작동하는 근대적/법적 주권의 행사에서 아이누는 배제되었고, 이들은 자신의 생활 터전인 홋카이도의 귀속 문제에서 자기결정권을 갖지 못한 채 부차적인 존재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홋카이도 ‘개척’과 ‘북부의 인디언’
도쿠가와 막부를 대신해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메이지 신정부가 들어선 직후인 1869년, 홋카이도에는 개척사(開拓使)가 설치된다. ‘개척’이라는 말이 상징하듯 일본의 홋카이도 ‘개척’은 미국의 서부 ‘개척’과도 견줄만한 것이다. 실제로 홋카이도 개척사의 외국인 고문이었던 호레이스 캐프론(Horace Capron)는 미국 농무부 장관 출신이며, 한국에서는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말로 더 유명한 윌리엄 클라크(William S. Clark)는 삿포로농학교(홋카이도대학의 전신) 설립 과정에서 중책을 맡은 인물이다. 이들은 미국으로 이주해온 자신들의 선조가 그러했던 것처럼, 일본인 이주자의 입식(入植)에 기반한 홋카이도의 농업화를 주장했다. 그런데 이들이 제안한 홋카이도의 농업 발전은, 막대한 규모의 삼림을 개간해 오늘날 홋카이도의 대표적 심볼이 된 드넓은 초원과 목장을 만드는 과정에 다름아니다. 결국 서부 ‘개척’의 논리를 고스란히 따르는 홋카이도 ‘개척’에 의해, 아이누의 옛 생활 방식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사라지거나 동화될’ 대상으로 간주된 아이누는, 말하자면 일본의 인디언이었던 셈이다.
한편 캐프론이 제안한 홋카이도로의 대규모 이주 계획은, 당시 일본에서 중요한 사회 문제로 다루어졌던 인구 과잉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일본 정부는 위생 조건 향상 등에 힘입어 급증한 인구를 한정된 국내 식량 생산 능력으로는 부양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885년부터 시작된 하와이행 관약(官約) 이민 사업을 비롯해 다각도의 이주정책 - 훗날 ‘기민(棄民)’ 정책으로까지 평가받는 - 을 모색했다. 이 때 과잉인구를 ‘해소’할 수 있는 출로로서, 그리고 국방상 주목받은 곳이 ‘제국의 북문’ 홋카이도다. 일본 정부의 정책적 지원 하에 홋카이도로 이주한 일본인의 수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이제 권력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숫적으로도 아이누는 ‘소수자’의 위치로 전락한 것이다. 이처럼 홋카이도의 ‘일본화’가 가속화되면서, 아이누를 강제로 ‘일본인’화하는 동화정책도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1871년에는 호적법이, 1876년에는 창씨개명이 공포되었다. 훗날 식민지 조선에 도입될 법률과 제도가 홋카이도에서는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관철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누족 전통 복장을 입은 여성

특히 아이누에 대한 일본 정부의 ‘동화정책’ 중 가장 오랜 기간 아이누를 억압한 정책은 1899년 제정되어 근 100년 동안 존속되었던 ‘홋카이도 구토인(舊土人) 보호법’(이하 구토인 보호법)이다. ‘구토인’이라는 말은 본래 1878년 아이누를 지칭하는 행정용어로서 생겨난 말인데, 이 말은 한 세기 동안 국가에 의한 ‘보호’라는 명목 하에 아이누를 ‘일본인’과는 구별하는 표현이었다. 근대 국가 ‘일본’과 아이누 간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문명의 ‘진보’를 상정한 진화론적 시각에 입각한 것이었기에, ‘미개하고 열등한’ 존재인 ‘구토인’ 아이누는 동화교육을 통해 일본인과의 차이를 분쇄시켜야만 ‘문명화’될 수 있는 존재로서 간주되었다.
‘구토인 보호법’에 의해 아이누는 가구당 1만 5천 평 이내의 토지를 지급받았고, 그 토지 밖으로는 나오지 못하도록 규제를 받았다. 그런데 이 토지는 대부분 개간하기 어려운 황무지였을 뿐 아니라, 아이누 자신도 농업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본래 수렵·목축 등에 종사하면서 대지의 신을 섬겨온 아이누는 토지를 파괴하는 농사가 신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누를 ‘정착’시키려는 시도는 애초부터 성공을 기대하기 힘들었고, 결국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대부분의 토지는 일본인에게 넘어갔다.
또한 ‘구토인 보호법’은 아이누를 일본의 호적제도 내에 강제로 편입하고 이들의 ‘일본인’화를 위해 ‘구토인’에게 일본식 교육을 강제했기에 아이누에 대한 문화말살적 성격까지 갖고 있었다. 이에 맞서 아이누는 1930년에 홋카이도 아이누 협회를 설립하고 아이누 고유의 문화·전통 보존을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홋카이도 아이누 협회는 1961년에 홋카이도 우타리(아이누어로 동포를 의미) 협회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문화 진흥 사업 외에도 ‘구토인 보호법’ 철폐를 비롯한 아이누의 사회적 지위개선 문제 등을 목표로 활동해왔다. ‘아이누 선주민족 결의’의 청원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이 협회의 가입회원 수는 2007년 현재 약 3천 9백명이며, 내년 4월 1일에 홋카이도 아이누 협회로 재개칭될 예정이다.
‘홋카이도 구토인 보호법’은 1997년 5월에야 새로이 제정된 ‘아이누 문화진흥법’으로 대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오랜 기간 동안 아이누에 대한 강도높은 제도적 속박과 사회적 차별이 지속되었기에 아이누는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열악한 지위로 내몰려왔다. 홋카이도를 대표하는 관광 ‘상품’으로서, 토산품 제조나 민속 공연 등을 주업으로 삼는 ‘소수집단’으로 취급되어 온 것이다.
2006년 10월 홋카이도 도청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조사 당시 홋카이도 내의 아이누족은 총 2만 3782명(8274세대)이다. 그러나 스스로 아이누임이 밝혀질 경우 생길 수 있는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아이누임을 밝히지 않은 사람도 많아, 북해도 우타리협회는 아이누의 실제 인구가 조사 결과의 수배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기도 한다. 조사 결과 최근 6-7년간 차별받은 경험이 있는 아이누는 2.1%로, 경험이 없는 사람(72.3)을 크게 밑돈다. 이러한 수치만을 놓고 봤을 때는 아이누에 대한 차별이 적잖이 사라진 듯 보인다. 그러나 ‘취직이나 결혼에서 지금도 차별이 있다’고 호소하는 아이누도 적지 않다. 특히 생활보호를 받고 있는 아이누의 비율은 1000명당 38.3명으로, 전국 평균 24.6명에 비해 13.7명이나 높다. 아이누의 고교·대학 진학률 또한 각각 93.5%, 17.4%로 전국 평균보다 각각 4.8 포인트, 21.1포인트가 낮다. 아이누에게 필요한 대책(복수응답 가능)을 묻는 질문에서는 ‘교육의 충실’이라고 답한 비율이 78.6%로 가장 높았고, 기타 문화의 보존과 전승(50.2%) 생활과 직업의 안정(32.0%) 주택이나 생활환경의 정비(18.7%) 등이 있다. 이에 ‘아이누 선주민족 결의’의 후속조치로서 신설될 예정인 전문가 간담회 등을 통해, 정책결정과정에서 아이누의 제도적 권리를 어떻게 요구하고 달성할 것인지가 앞으로의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다문화주의인가, 다문화제국인가.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총리와 거의 같은 시기에 오스트레일리아 총리에 취임한 케빈 러드(Kevin Rudd)는, 지난 2월 13일 오스트레일리아의 선주민 애버리진에 대한 기존 정책의 문제점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이를 의회에 제출했다. 국제적 맥락에서 러드 총리의 사과 성명은 ‘아이누 선주민족 결의’와 흥미로운 비교를 이룬다. 아이누와 애버리진은 국가의 구성원에게 부여되는 시민권이 형식적으로는 국민 모두에게 평등한 듯 해도 실제로는 민족적 차이에 따라 시민권의 불평등이 분명 존재한다는 점을 뚜렷이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일본의 경우 아이누에 대한 공식적 사과는 부재했다는 점에서 러드 총리의 사과문이 ‘아이누 선주민족 결의’보다 한 발 나아간 점이 있지만, 구체적 정책 실행이 미결과제로 남아있다는 점은 공통적으로 지적된다. (단 오스트레일리아는 국내법과의 불일치를 이유로 UN 선주민 권리선언에 반대했다)
아이누와 애버리진에 대한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책노선 변화는 이전까지 동화정책을 기조로 해왔던 국민국가 내의 ‘차등적 시민권’ 문제,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국가의 방향전환을 묘파해낼 중요한 실마리이다. 전지구화의 가속화와 더불어 자본과 인간의 국제적 이동성이 높아지면서 국민국가 내의 민족 구성도 유동적으로 변모해가고 있다. 따라서 민족간의 사회적·문화적 차이를 간과하고 소수민족의 인권을 무시하는 동화 일변도의 민족정책은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불과 몇 달 차이로 발표된 선주민의 지위 인정 및 권리 보장 논의는 특정 선주민족을 위한 시책으로서의 측면보다는 국가 차원의 민족정책 전환이라는 측면에서 부각되었다. 아이누와 애버리진을 특정 국가·지역의 특수한 사례로만 보아서는 안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날 어느 국가나 지역을 막론하고 이주의 교차망 가운데 놓일 수 밖에 없는 국민국가의 향후 진로를 타진할 시금석으로서의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과 함께, 선주민족의 인권 보호·시민권의 확장 움직임이 원칙적으로는 다문화주의를 표방하되 소수민족의 정치적 자결권 인정 등 ‘민감한’ 이슈들은 철저히 배제하면서 진행된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선주민족 정책에서도 ‘수동적’ 위치에 있는 선주민에 대한 국가의 ‘능동적’ 정책개입이라는 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 때, ‘문화적 다양성’은 미국의 다문화주의가 그러했듯 강도 높은 국가로의 통합으로 전환될 공산이 크다. 이러한 문제를 염두에 두고, 다문화주의와 결합한 선주민족의 지위 인정이 민족적 차이에 의한 법적·사회적 불평등을 적극적으로 해소하기보다는 오히려 온존시킬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더 나아가서는 다문화주의의 기치 아래 국가가 다양한 민족집단을 위계화하고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체제, 즉 (다름아닌 일본과 영국이 이미 역사적으로 구축했던!) 다민족제국 체제의 새로운 변종이 배태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국의 규율과 질서 아래 ‘보호’를 구실로 자행된 선주민족/소수민족에 대한 억압이 다문화주의의 이름 아래 재생될 여지는 없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일은 여전히 유효한, 현재진행형 작업이다.
90년대 이후 급증한 남미 출신 일본계 역이민(데카세기) 및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이 증가하면서, 일본의 다문화사회론은 한층 확산 추세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다문화사회론이 사회 현상에 대한 일시적 분석 및 ‘처방’에 그치지 않고 진정성과 깊이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일본 사회의 역사적 궤적을 되짚고 고민하는 일이 마땅히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개척’과 ‘보호’라는 이름 아래 수탈받아온 아이누나, 제국주의의 상흔이 여지없이 각인된 다수의 재일 조선·한국인들에 대한 깊은 성찰은, 그래서 중요하다. 전후 일본은 전쟁 기억·식민지 경험과의 단절을 시도하면서 ‘단일민족 일본’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만들어내고자 했다.
그 안에서 ‘일본인’의 경계선상에 위치한 아이누나 재일조선·한국인, 외국인 노동자 등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메커니즘은 이들 모두에게 꾸준히 작동했다. 또한 역으로, 아이누에 대한 선주민 지위의 인정 문제는 일본 내의 재일조선·한국인 사회에게도, 그리고 일본과 마찬가지로 다문화주의의 부상과 더불어 ‘단일민족신화’에서 깨어날 것이 요청되는 한국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이누 선주민족 결의’의 채택은 ‘전후 60년’을 갓 넘긴 오늘의 일본이 결코 ‘단일민족국가’가 아님을 보여준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 가능성과 한계의 음미가 곧 다문화주의의 이상과 다민족제국의 ‘위험성’ 사이에 상존하는 긴장을 예민하게 감지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 했을 때, 이는 곧 모든 다문화주의가 지향하는 진정한 의미의 ‘공생’을 만들어가기 위한 단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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