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ㆍ15 해방과 서대문형무소
연재 사건으로 본 서대문형무소 | 해방후편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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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지배가 200년은 더 갈 줄 알았는데….”(서정주)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짖는 소리 닭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
산천도 빛이 나고
해까지도 새 빛이 난 듯
유난히 명랑하다.(홍명희,「눈물 섞인 노래」)
조선의 대중들아 들어보아라
우렁차게 들려오는 해방의 날들
시위자가 알리는 말굽소리와
미래를 고하는 아우성 소리
노동자와 농민들은 힘을 다하야
놈들에게 빼앗겼던 토지와 공장
정의의 손으로 탈환하여라
제놈들의 힘이야 그 무엇이랴. 임화 작사,「해방의 노래」
국치일인 1910년 8월 29일부터 치면 정확히 34년 11개월 보름만이고, 외교권을 빼앗긴 1905년 을사늑약으로부터는 40년, 일제의 침략과 간섭이 시작되는 1876년 2월 2일 강화도조약 (병자수호조약)으로 기산하면 69년만이다.
8월 15일 일왕의 항복선언으로 한민족이 해방되었지만 국내에는 여전히 일제의 식민통치 기관이 군림하고 있었다. 또 영화나 연극에서처럼 해방의 소식을 들은 국민들이 손에손에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쏟아져 나오지도 않았다. 상당수 국민은 일제가 패망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다수의 국민은 긴가민가하고, 지방이나 산골벽지는 며칠이 지난 뒤에야 알았다. 한 작가의 수기를 통해 8?5 해방의 ‘풍경’을 들어보자.
청량리 정거장을 나서니 웬일일까. 기대와는 달리 서울은 사람들도 냉정하고 태극기조차 보기 드물다. 시내에 들어서서 독 오른 일본 군인들이 일촉즉발의 예리한 무장으로 거리마다 목을 지키고 경성일보가 의연히 태연자약한 논조다.
현은 전보 쳐준 친구에게로 달려왔다. 손을 잡기가 바쁘게 건국대회가 어디서 열리느냐 하니, 모른다 한다. 정부 요인들이 비행기로 들어왔다는데 어디들 계시냐 하니, 그것도 모른다 한다. 현은 대체 일본항복이 사실이기는 하냐 하니, 그것만은 사실이라 한다. 현은 전신에 피곤을 느끼며 걸상에 주저앉아 그제야 여러 시간 만에 처음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이 친구들로부터 팔월 십오일 이후 이틀 동안의 서울 정황을 대강 들었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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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들은 어디에 있었나
백범 김구는 광복군의 OSS대원들의 국내진공훈련을 시찰하기 위해 서안에 가 있다가 일제 패망의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서안훈련소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우리 청년들을 조직적 계획적으로 각종 비밀 무기와 전기를 휴대시켜 산둥반도에서 미군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입하게 하여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하여 인심을 선동케하고, 전선으로 통지하여 무기를 비행기로 운반하여 사용할 것을 미국육군성과 긴밀히 합작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계획을 한 번 실시해 보지도 못하고 외적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백범일지』
이승만은 임시정부 주미외교대표부의 전권대표로 미국에 머물고 있었고, 여운형은 국내에서 건국동맹을 결성하면서 해방의 날에 대비하였다. 박헌영은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6년 복역하고 출감하여 경성콤그룹 관련자에 대한 검거선풍을 피해 전라도 광주 백운동 벽돌공장 인부로 위장하고 있었다. 김창숙은 왜관경찰서에 갇혀 심한 고문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조선의용군은 연안에서 결전의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김일성은 중국 동북위 내에 설치된 조선공작단위원회 정치군사 담당 책임을 맡고 있었다. 김두봉은 연안에서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장으로 있었으며, 조동우는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최현배ㆍ이희승ㆍ이인ㆍ정태진ㆍ이극로ㆍ이중화ㆍ김양수ㆍ김도연ㆍ김법린ㆍ장현식 등 조선어학회 인사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았다.
조만식은 평양에 칩거하면서 독립의 꿈을 버리지 않았고, 홍명희는 충북 괴산에 은거하고, 김병로는 경기도 가평으로 내려가고, 김준연은 금곡의 전야에, 정백은 광산업을 핑계로 심산유곡을, 김약수는 하숙집을 전전하며, 이영과 최용달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막 풀려나 요양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제의 갖은 위협과 유혹을 피해 민족의 대의와 지절을 지켰다.
일제의 앞잡이로 전락하여 동조동근ㆍ징용징병ㆍ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은 지도급 인사들은 훨씬 많았다. 최남선은 중추원참의를 지내면서 경기도 사능리에서 전원생활을 즐기고 있었고, 이광수는 서재에 일장기를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목례를 하며 남대문을 지날 때는 두 손을 합장하여 조선신궁을 향해 묵도하면서 친일에 넋을 잃고 있었다.
배정자ㆍ최린ㆍ이각종ㆍ박춘금ㆍ이종영ㆍ전봉덕ㆍ김석원ㆍ박흥식ㆍ김연수ㆍ방응모ㆍ진학문ㆍ장덕수ㆍ서춘ㆍ신태악ㆍ김은호ㆍ김기창ㆍ정춘수 등 각계 지도급 인사들은 일제의 전쟁승리를 위해 일제에 협력하고 있었다.
정비석ㆍ유진오ㆍ조용만ㆍ모윤숙ㆍ김용제ㆍ최정희ㆍ장덕조ㆍ노천명ㆍ오영진ㆍ곽종원ㆍ조연현ㆍ양명문ㆍ김동인ㆍ주요한ㆍ박종화ㆍ김팔봉ㆍ김소운ㆍ백철ㆍ유치진ㆍ최재서 등 문인ㆍ예술가들은 줄줄이 친일 매족의 글을 쓰거나 예술활동을 통해 민족의 혼을 팔고 있었다.
박정희를 비롯한 정일권ㆍ김정렬ㆍ이종찬ㆍ최영희ㆍ정래혁ㆍ이응준ㆍ백선엽ㆍ채병덕ㆍ최경록ㆍ이형근ㆍ송요찬ㆍ장도영ㆍ유재흥 등 일본군과 만군의 장교들은 일제에 충성을 다하고, 김태선ㆍ이익흥ㆍ윤우경ㆍ윤명운ㆍ윤기병ㆍ변종현ㆍ신현확ㆍ장경근ㆍ진의종ㆍ이근직ㆍ이호ㆍ현석호ㆍ김치열 등은 고위 행정관료가 되어서, 조진만ㆍ이호ㆍ홍진기ㆍ민복기ㆍ조용순ㆍ이영섭 등은 총독부 법관으로 일제에 협력하고 있었다.
독립운동의 진영에 선 지사들에게 8ㆍ15는 해방이고 광명이었지만, 친일파ㆍ민족반역자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고 좌절이었다. 그렇게 해방의 날은 왔고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하여 전국의 모든 감옥과 경찰서 구치소에서 항일ㆍ반일 독립운동가들이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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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말 10만여 명의 정치사상범
일제강점기 조선은 전국토가 감옥이나 다름 없었고, 소수의 친일파를 제외한 전민족이 죄인이 아닌 죄수나 진배없었다. 그래서 8.15는 노예로부터 풀려남이었고 감옥에서 해방이었다.
사마천은 “지면에 옥(獄)을 그려놓아도 사람은 그것을 피하고, 나무를 깍아 형리(刑吏)를 만들어도 사람은 그것과 면대하기를 싫어한다.”라고 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감옥이란 지상의 지옥(獄者陽界之鬼府)”이라 하였다. 해방 때에 한국의 감옥에는 대체로 2만여 명의 ‘사상범’이 수감되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여기서 말하는 ‘사상범’은 항일ㆍ독립운동가를 총칭한다. 일제가 패망할 때 전국의 감옥에 갇힌 우리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자료와 통계는 일제가 대부분 소각하거나 주요 자료를 일본으로 가져가서 정확한 숫자는 알기 어렵다. 이승만정부에서 법무장관을 지낸 권승렬은 “일제시기에 남북 합해서 1만 2천 명의 죄수를 수용했다.”②라고 밝힌 바 있다. 한 연구가는 “8월 15일과 16일 이틀 사이에 서울을 중심으로 풀려난 사상범 수만 1천 1백 명에 이르고 있다.”③라고 밝혔다. 또 다른 연구가는 “당시(해방) 남한에서 석방된 항일 애국투사들의 숫자는 합계 1만 6천 명이나 되었다.”라고 분석하였다.
일제말기에 일제에 의해 수감 중이거나 석방된 조선인 ‘사상범’의 숫자는 대략 1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몇몇 자료를 근거로 추산하면 대략 10만여 명으로 짐작된다. 가령 1926년부터 1943년 상반기까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사국에 수리된 인원은 2만4천441명(2천378건), 검찰에 의해 기소된 인원은 7천578명 (1천395건)이었는데, 이를 근거로 추산하면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경찰에 검거된 정치사상범은 대략 6~7만 명(검사국 수리 인원의 2.5배 이상) 이었다.⑤
일제가 1930년대 만주침략과 중ㆍ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시작하면서 조선인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특히 태평양전쟁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조선의 애국자와 반전인사들을 몰살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는 등 전세의 변화가 아니었다면 10만 명에 이르는 민족주의자들을 학살할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1945년 8월 8일 소련군의 대일참전 소식을 받은 총독부경무국은 전국 175개 경찰서장에게 비상사태에 따른 제1호 조치를 발령했다. 내용은 “소련군 침입시에 공산계 요시찰인을 즉각 검거하라.”는 지시가 무전으로 타전되었다.
특별명령을 하달받은 일선경찰서와 헌병대는 즉각 요시찰 인사들의 검거에 나섰다. 일제가 유사시에 학살하고자 했던 요시찰 반일 인사는 무려 5만여 명이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여기에는 사회주의 계열은 물론 우익진영 인사들과, 종교ㆍ교육ㆍ청년ㆍ여성ㆍ독서회ㆍ농촌 운동 관련 인사들이 포함되었다. 이 때 구체적으로 몇 명이 검거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경무국이 8월 12일부터 조선인 탄압에 관계되는 문서들을 모아 총독부 뒷마당에서 소각한 것을 비롯, 16일부터는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에서부터 전국 일선 파출소에 이르기까지 경찰기관이 요시찰인명부 등 모든 관련 문서를 소각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1945년 4월초, 조선이 전장화할 것에 대비하여 총독부경무국을 통해 ‘요시찰인에 대한 조치계획’을 세우고, 전국 각 경찰서장에게 극비리에 시달했다. 지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공산군(소련군)이 조선에 침입하면 공산계 요시찰인을 예비검속하라.
(2) 미ㆍ영군이 상륙하면 민족주의자를 예비검속하라.
(3) 전선이 경찰서에 가까워질 때는 예비검속자를 후방으로 옮겨라.
(4) 만일 예비검속자를 후방으로 옮길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경우, 적당한 방법으로 처리하라.
제4항의 “적당한 방법으로 처리”는 곧 사살하라는 뜻이었다. 소련의 대일참전 결정이 확인되면서 총독부는 일선경찰서에 ‘요시찰인’을 일제 검거하라는 비밀지령을 다시 내렸다. 조선총독부는 7월 7일을 기해 요시찰인 중에서 약 3천 명을 구금했는데, 정무총감은 후환이 없도록 하기 위해 이들의 총살을 주장하고, 보호관찰소장(검사)은 총살은 좀더 관망하는 것이 좋겠다는 주장을 펴고 있던 중 일제의 항복이 예상보다 빨리와서 집행되지 않았다.
예비구금된 ‘요시찰인’들은 서대문형무소와 전국의 감옥ㆍ경찰서에 분산 수용되었다. 항일인사들에 대한 대량학살 음모는 총독부에서만 추진된 것은 아니었다. 일제의 주구노릇을 하던 박춘금 일당이 8ㆍ15 직전에 대의당을 만들어 친일세력을 규합하면서 반일인사로 지목되는 한국인 30만 명의 학살을 추진하다가 역시 일제 패망이 빨리 오는 바람에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⑥
대의당은 친일주구 박춘금을 중심으로 이성근ㆍ이광수ㆍ김동환ㆍ손영목 등이 조직한 악질 친일 전위단체이다. 이들은 강령 제5항에서 “오등은 모든 비결전적 사상(事象)에 대하여는 단연 이를 분쇄하여 필승태세의 완벽을 기함”이라고 명시하였다. 이는 침략전쟁에 반대하거나 일제에 협력하지 않는 조선인의 말살을 뜻한다. 대의당이 조선주둔 일본군과 밀계하여 조선인 30만 명을 학살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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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말 국내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민족주의자들이 일제에 협력하거나 칩거하고 있을 때 이에 대비한 사람이 있었다. 일제의 패망을 내다보면서 건국동맹을 결성한 몽양 여운형은 1945년 8월 14일 니시히로 총독부경무국장으로부터 일제의 패전소식과 함께 과도기의 조선 치안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여운형은 정치사상범과 경제범의 석방, 3개월간의 식량확보, 조선인의 정치활동 및 청년ㆍ학생ㆍ노동자ㆍ농민의 조직활동에 대한 불간섭 등을 제시하여 이를 확약받고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1년 전 비밀리에 조직한 건국동맹에다 반일인사들과 출옥 독립지사들을 포함시켰다.
건준은 여운형을 위원장으로 하고 안재홍을 부위원장으로 하여 중앙부서로 총무부(부장 최근우), 재무부(이규갑), 조직부(정백), 선전부(조동우), 무경부(武警部, 권태석) 등 좌우익 인사들을 고루 배치하였다. 그리고 2천여 명의 청년ㆍ학생으로 건국치안대를 조직하여 치안을 맡게하고, 식량문제위원회를 구성하여 식량확보에 전념토록 하였다.
여운형은 엔도 총독과의 회담에 따라 15일 오후 4시 다수의 건국동맹원들과 함께 정치범 석방을 위하여 서대문형무소를 찾았다. 그러나 이날은 법무국의 수속 절차가 끝나지 않아서 이들을 석방시키지 못하였다. 16일 오전 9시 여운형은 이강국ㆍ최용달 등과 함께 사상범보호관찰소장 나가자기 유우조(長崎祐三)와 서울 지방검찰청 백윤화 검사를 대동하고 서대문형무소를 재차 방문하여 사상범과 경제범의 석방에 입회하였다. 여운형은 형무소 대강당에 집합한 석방자들에게 그 동안 긴 세월의 노고를 위로하고, 조선 민족이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경거망동을 삼갈 것을 당부하였다.⑧
여운형 일행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애국인사들의 석방을 환영한데 이어 마포형무소로 가서 정치범의 석방에도 입회하였다. 이날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갇혀 있던 수많은 애국인사들이 풀려났다. 석방자 가운데는 항일지사들 뿐만 아니라 일반 잡범들도 포함되었다. 혼란을 틈타서 파렴치범들까지 끼어 나왔다. 이미 형무소측이 통제력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항일지사들이 갇혀 있던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자들이 풀려난다는 소식이 시민들에게 전해지면서, 독립문에서 형무소에 이르는 큰 길에는 ‘혁명동지 환영’의 펼침막을 든 환영군중의 물결이 넘쳐흘렀다.
이날 오전 11시, 거리에는 트럭ㆍ승용차ㆍ전차 할 것 없이 빽빽하게 시민들이 매달려 급조한 태극기를 매달며 ‘해방만세!’ ‘독립만세!’를 외치며 홍수와 같이 거리를 메웠고, 그 가운데를 석방된 정치범을 선두로 한 대행렬이 종로까지 시위행진을 하였다.
한편 각 지방에도 15일 정치범과 경제범을 석방하라는 석방 지휘서가 발송되었다. 청주에 있는 ‘사상범예방구금소’⑨에는 여운형이나 그 대리인이 입회해야 된다고 하여 여운일이 대리인으로 입회를 하고 석방이 되었다.
여운형은 총독부로부터 일시적인 조선치안의 책임을 제의받고 정치ㆍ경제범의 석방 등을 조건으로 내세워 이를 관철하였다. 그리고 16일에 서대문형무소와 마포형무소를 직접 방문하여 이들이 석방되는 것을 확인하였다.
몽양이 원등(遠藤)이에게 정치범 석방을 요구할 때에 원등이는 연합군이 들어올 때까지 두겠다고 하였다. 몽양은 당일 석방을 강경히 주장하여 승낙을 받았다. 15일 오후 4시에 석방한다고 하여 4시에 몽양과 다수 건맹원들이 서대문형무소에 갔었다. 법무국 수속이 다되지 못하였다고 하여 16일 오전 10시에 석방되었고, 각 지방에는 15일에 석방하라는 통지가 갔었다. 특히 청주예방구금소에는 몽양이나 대리인이 가야 석방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여운일이 몽양 대리로 가서 석방시켰다.⑩
해방직후 한국정치의 중심이었던 여운형은 자신이 가장 먼저 할 일을 항일인사들의 석방에 두었다. 그리고 형무소에 달려가 구속자들의 석방을 지휘하였다. 앞에서 말한대로 그러나 이때 전국적으로 풀려난 정치범, 항일지사가 몇 명이었는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해방공간에서 가장 먼저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는 ‘사상범’의 석방을 지휘한 여운형은 1929년 7월 8일 상해에서 일경에 피체되어 조선으로 압송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어 1932년 7월 27일 가출옥으로 석방되었다.
여운형이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타리에서 62세로 암살당하자 시인 김광균은 장례일에 「상려를 좆으며 여 선생 장례일」이라는 시를 통해 몽양을 추모하였다.
황폐한 제방에서 들려오는 통곡 속으로
지금은 한낱 침묵의 수레위에 실려가는 그를 위하여
우리들은 다시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하랴
차라리 진달래와 봉선화와 민족의 탄식으로
하나의 화환을 엮어
이 영원한 선구자의 이마를 에워싸라…
다만 때묻은 인민의 손으로
그의 관을 덮으라
일월(日月)과 파도가 고요한 그곳에 그를 쉬게 하라.⑪
우리는 이 한 편의 시에서 여운형과 서대문형무소의 관계만이 아니라 해방조국과 서대문형무소의 기막히고 처절한 사연과 곡절의 일단을 읽는다.
미군 점령군으로 남한 진주
한민족이 주체적으로 해방을 이루지 못한⑫ 민족의 진로는 험난했다. 태평양 미육군총사령부는 1945년 9월 7일 남한에 군정을 발표하고 이틀 뒤 서울에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을 설치하였다. 재조선 미군사령관에 임명된 미 제24사단장 하지중장은 9월 8일 오끼나와기지에서 병력 9만7천명을 인솔하고 인천에 상륙하여 당일로 서울에 입성하고 9월 9일 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일본의 조선총독 아베로부터 항복문서에 조인을 받았다.
하지는 9월 11일 일장기 하강식을 거행함과 동시에 아베를 해임하고 미군정장관에 아놀드 소장을 임명하는 등 군정체제를 갖췄다. 이로써 한반도의 남쪽은 일제를 대신하여 미군이 지배하는 권력이 등장하고 미군정이 3년여 동안 유지되었다. 미군정은 해방 당일 발족한 여운형의 치안대를 비롯한 각종 사설단체의 경찰권행사를 금지시켰다.
점령군사령관 하지는 9월 2일 <미군 상륙에 제한 재조선 미군사령관 포고 1>을 발표, “이기주의로 날뛴다든가 혹은 일본인 및 미군상륙에 대한 반란행위, 재산 및 기설 기관의 파괴 등의 경거망동을 하는 행동은 피할 것이며…”라고 새로운 점령군의 시책을 공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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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이태준, 「해방전후」, 『문학』, 1946년 7월호.
②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82쪽, 역사비평, 2007.
③ 김대상, 『해방직전사의 재조명』, 236쪽, 해성, 1990.
④ 류상영, 「8ㆍ15이후 좌ㆍ우익청년단체의 조직과 활동」, 『해방전후사의 인식4』, 53쪽, 한길사, 1989.
⑤ 지수걸, 「조선정치사상범 탄압을 문제삼아야 할 이유」,『역사비평』통권 45호, 92쪽, 역사비평사, 1998.
⑥ 『민족정기의 심판』, 혁신출판사, 1949.
⑦ 김삼웅, 『서대문형무소근현대사-일제시대편』, 297~298쪽, 나남출판, 2000.
⑧ 송남헌, 『해방 3년사1』, 35쪽, 까치, 1985.
⑨ 일제는 1942년부터 조선총독부의 예방구금령에 의하여 사상범이 사상전향을 거부하면 복역을 마치고 형기가 만료되어도 석방하지 않고 청주에 있는 예방구금소에 계속 구금하였다. 8ㆍ15 석방자 중 문갑송ㆍ강진 등 거물급 공산주의자가 여기서 많이 석방되었다.(송남헌 앞의 책, 36쪽)
⑩ 이만규, 『여운형선생 투쟁사』, 191쪽, 민주문화사, 1946.
⑪ 졸저, 앞의 책, 194쪽.
⑫ 해방직후 여운형은 “대체 조선 독립이 단순한 연합국의 선물이 아니다. 우리 동포는 과거 36년간 유혈의 투쟁을 계속하여온 혁명으로 오늘날 자주독립을 획득한 것이다.”라고, 1945년 10월 1일 신문기자와 문답에서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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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이태준, 「해방전후」, 『문학』, 1946년 7월호.
- ©월간 말
- 기사입력: 2008-07-02 13:56:21
- 최종편집: 2008-07-02 13:5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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