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을 수 있다’는 꿈은 이뤄진다”
서비스 여성노동자 건강권 운동, 500일 간의 보고서
해외사례 살펴보며 공감주제 발굴
2006년 8월10일.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위원회는 중요한 사안을 의결했다. 위원회 산하에 비정규·영세·여성· 이주노동자 등 안전보건 취약노동자의 건강권 의제를 개발하고 사업을 진행할 기구를 두기로 한 것이다. 지난해 6월 취약분과가 드디어 발족했다. 민주노총은 취약분과가 단순히 취약노동자의 건강문제를 제기하는 창구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서 주체를 세우고 지속적인 건강권 운동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지원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교육센터에서는 민주노총의 이러한 결정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판단했고, 적극 지원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2006년 가을, 취약분과 준비를 위해 서비스연맹·여성연맹을 방문해 상황을 파악하고 노동자건강권에 대한 연맹의 입장을 확인했다. 지역노조와 특수고용노동자대책위원회를 만나 함께 고민을 나누었다. 교육센터가 만난 조직들은 서로 처한 상황이 달랐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건강권이 중요하긴 한데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충분히 예상됐던 것이다. 건강권은 배부른 활동이라고 여기거나, 남는 힘이 없으니 건강권 운동을 하지 못한다는 식의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노조간부들을 욕할 것이 아니라 건강권 운동이 조직에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지 설득하는 접근법이 필요했다. 사례가 필요했다.

-
- 서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
- 사진 더 보기
- ⓒ 매일노동뉴스
먼저 해외사례부터 찾았다. 여성노동자의 건강권 의제들을 살펴보고, 특수고용노동자와 관련해 운수노동자의 의제를 확인했다. 영세사업장 노동자와 관련한 지역운동 사례들도 점검했다. 해외의 성공적 운동사례들이 여러 가지 발견됐다. 그 중 하나가 유통서비스분야의 다양한 건강권 운동이다. 외국의 서비스노조들은 하루종일 서서 일하지 않고 중간에 앉을 권리를 요구하고, 자유롭게 화장실 가는 운동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건강권사업은 미조직 노동자를 조직하는 중요한 과정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마침 서비스연맹은 ‘이랜드투쟁’을 겪으며 백화점 조직화를 모색하는 중이었다.
2006년 12월8일, 교육센터는 취약노동자 건강권 운동을 주제로 간담회를 개최했다. 어떤 식으로 운동을 시작할 수 있는지 길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건설연맹 최명선 국장·비정규노동센터 김주환 부소장·서울지역일반노조 임재경 위원장이 함께했다. 간담회의 결과는 유익했다. 업종에 따른 특정한 주제를 잡아내 구체적인 운동을 전개하고 확산시키는 형태가 바람직하다는 입장이 마련됐다.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에게 의자를 제공하는 운동은 꽤 적절하다는 평가가 내려졌다.
민주노총에서는 서비스연맹부터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서비스연맹도 해외 사업사례를 확인하면서 적극 검토하기 시작했다. 2006년 12월19일,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위원회는 취약분과 건설과 관련한 방침을 확정했다.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를 중심으로 모범적 건강권 활동사례를 만들어 취약노동자 전체로 확산하기로 한 것이다. 교육센터는 이에 발맞춰 2007년 교육센터의 핵심사업으로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 건강권 사업을 하겠다고 결의했다. 그리고 2007년 1월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의 건강권 문제를 매월 교육센터가 발행하는 ‘일과 건강’의 기획특집으로 다뤘다.
“의자는 서비스 노동자에 대한 존중이다”
상당히 긴 시간 동안 현장에서 문제를 찾아내고, 어떤 것부터 해야 할지 연맹과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체 과정을 간단히 정리하면, 네 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현장의 안전보건 문제 확인과 의제 발굴
의제를 발굴하기 위해 택한 방법은 현장 노동자 의견수렴 및 서비스산업의 안전보건 문제 문헌자료 수집과 분석이었다. 해외에서는 이미 다양한 의제들이 발굴됐고, 운동경험이 축적됐기에 발굴된 의제들이 어떤 식의 운동으로 이어졌는지 확인했다. 선정된 의제와 관련해 제도적 대책이 필요할 경우를 대비해 다른나라 산업안전보건법이 정한 서비스노동자 관련조항을 분석하기도 했다.
해외사례는 큰 도움이 됐다. 나라마다 문화와 역사가 다르지만 노동자를 대하는 기업과 사회의 태도는 너무도 닮아 있었다. 다양한 방식의 건강권 의제가 개발되고 운동으로 조직된 과정을 확인하면서, 우리나라 유통서비스분야에서 건강권 운동의 전망을 모색할 수 있었다. 법·제도에 대한 검토도 크게 도움이 됐다. 건강권 운동이 활성화되지 않은 분야는 산업안전보건법의 기본적 권리들조차 실현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법에 정해진 기본적 권리를 실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고 현실적인 목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핵심 의제 선정과 운동 목표 수립
서비스분야의 건강권 문제는 매우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장시간 서서 일하는 문제 △근골격계질환·성대 결절 △화장실에 자주 못가는 것 △휴식공간 부족과 산업재해가 발생해도 제대로 조치하지 회사의 관행 △친절에 대한 모니터링 △고객으로부터 받는 인격적·물리적 폭력 등등. 이 중 가장 심각한 것은 감정노동에 의한 우울증 등 정신건강 문제였다.
서비스연맹에서도 감정노동의 심각성은 이미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맹에서도 동의한 것은 감정노동부터 문제제기를 해서는 답이 나오기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피부에 와닿을 수 있는 다른 문제를 찾아내 그것을 해결하는 경험을 쌓는 것이 서비스연맹에게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다. 여기에 딱 맞는 것이 화장실을 마음대로 가는 것이나 의자를 제공해 고객이 없을 때 앉아서 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영국에서 진행된 '서비스노동자 존중 캠페인'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캠페인은 서비스노동자들에 대한 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고객과 회사를 상대로 진행되는 운동이다. 백화점과 마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만나 물어봤다. 많은 노동자들이 의자를 선택했다. 서비스연맹에서도 의자를 놓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목표라고 판단했다. 특히 우리나라 산업안전보건법 산업보건기준에관한규칙 제277조에 "장시간 서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의자를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기 때문에 그러한 판단에 힘이 실렸다.
다음 단계는 의자를 제공하라는 요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립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현장에서 앉아 일하기 위해 우리가 운동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서비스 여성노동자는 노동을 천시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의해 모든 문제들이 비롯된다. 때문에 의자를 놓는 것에서부터 서비스 노동자의 몸과 마음을 존중하는 운동이 시작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궁극적으로 감정노동의 문제까지 나아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셋째, 사업계획 마련과 확정
약 8개월 정도의 시간을 들여 대략적인 그림을 완성했다. 서비스연맹 주요 간부들이 과연 이 사업에 동의할 것인지 궁금했다. 마침 11월 중순에 ‘서비스 비정규직 노동자 현실과 과제’라는 세미나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건강문제를 발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세미나에는 서비스연맹 소속 노조간부들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교육센터는 지금까지의 작업내용을 정리해 발표했다.

-
- 서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
- 사진 더 보기
- ⓒ 매일노동뉴스
백화점과 마트에서부터 서비스노동자에게 의자를 제공하라는 슬로건이 갖는 의미에 피자헛 노동자·호텔노동자·경비업체 노동자·관광회사 노동자 등 다양한 서비스노동자들이 동의했다. 적극적으로 운동의 필요성에 공감했고, 이 경험은 이후 서비스연맹이 적극적으로 연맹 대의원대회 때 교육을 배치하는 계기가 됐다. 민주노총과 서비스연맹은 '서비스 여성노동자에게 의자를'이라는 슬로건에 동의했다. 2008년에는 건강권 의제로 선정됐다. 이 시점에 중간보고서 형태로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의 건강실태와 의자놓기 운동의 의미를 자료로 배포하기 시작했다. 외국사례 등을 다양하게 담아놓은 자료였기에 이후 언론에서 기사를 작성하는 데 많이 인용됐다. 서비스연맹과 함께 논의해 전국적인 캠페인 사업으로 가져가기로 합의했다. 세부 사업계획을 마련했다. 그리고 서비스연맹 대의원대회에서 2008년 주요사업으로 의결되기에 이른다.
넷째, 본격적인 사업추진
서비스연맹에서는 고객지원을 받는 운동을 기획했다. 고객이 동의하지 않으면 의자를 놓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보다 설득력 있게 내용을 준비해야 했다. 지난 3월부터 5월까지 백화점에서 근무하는 화장품 판매 여성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무엇이 힘든지, 서서 일하는 시간은 얼마나 되며 어떤 건강상의 문제들을 안고 있는지 설문조사를 했다.
하지정맥류 건강검진을 배치해 서서 일하는 탓에 하지정맥류가 얼마나 발생하는지 확인했다. 다리 근전도 변화를 측정하는 실험연구로 일하는 노동자와 앉아서 일하는 노동자 사이의 근육긴장 및 피로의 차이를 조사했다. 백화점에 방문해 의자에 앉을 수 있는지 없는지, 화장실은 몇 개나 있는지 등 구체적인 노동조건을 조사했다. 이러한 연구조사는 서비스 건강권 사업 자문단을 민주노총 취약분과에서 구성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문단에는 정진주(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이윤근(인간공학·노동환경건강연구소 책임연구원)·이수정(민주노무법인 노무사)·정최경희(산업의학·경희의료원)·윤간우(산업의학·녹색병원) 등의 연구자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서비스연맹의 캠페인 사업 준비를 위한 전문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조사는 잘 이뤄졌다. 사회적으로 설득력 있게 의자의 필요성을 제기할 수 있게 됐다.
이제 본격적으로 캠페인을 전개하는 데 중요한 것은 우리사회의 진보단체와 여성단체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이 사업에 동참하느냐였다. 논의결과 캠페인단 발족을 위한 워크숍을 진행, 각 단체 담당자들과 서비스여성노동자 건강실태와 캠페인 사업 의의와 방향에 공감대를 형성하기로 했다. 지난 18일 워크숍에 이어 22일 드디어 캠페인단이 발족했다.
건강권 의제 발굴의 본보기로 확산될 것
한번 떠들고 끝나는 사업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민주노총의 원칙이었다. 건강권 운동의 주체를 형성하고 지속적인 건강권 활동이 연맹단위에서 이뤄지도록 하겠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 목적은 달성되고 있다. 서비스연맹은 아직 노동안전보건 담당자를 임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연맹의 정책국장과 여성부장, 조직 활동가들이 이 사업의 내용과 방법을 숙지하고 있다. 의자를 놓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건강권 사업으로 이어지도록 해야 함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아직 노동자건강권 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노조 조직에서 건강권 의제를 발굴하고 사업으로 만들어나가는 일련의 과정이 정리된 것도 성과다. 앞으로 민주노총은 아직 노동안전보건위원회에 결합하지 못한 다양한 연맹에서 의제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건강권 운동 조직화를 시도하게 될 것이다.
이번 사업을 통해 교육센터 역시 큰 깨달음을 얻었다. 한국사회는 아직까지 제조업 노동자와 대규모 사업장 정규직 노동자·남성노동자의 건강문제가 주요 의제다. 교육센터는 무언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번 사업을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사회 취약노동자들이 갖는 특성을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취약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건강과 안전이 법에 의해 제도적으로 보호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물론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주장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자신들의 노동이 현재와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모른다는 게 중요한 문제였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건강권이 법에 정해져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은 새로운 노동을 꿈꾸는 것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이번 사업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의자를 제공하도록 법에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서비스 여성노동자들이 놀라는 표정을 바로 앞에서 확인하는 것은 너무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고객이 없을 때 앉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노동자들의 얼굴 가득 기쁜 웃음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서 현실적 목표를 구체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의 중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법에 있다고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건 노동자들도 잘 알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고객과의 공동행동을 제시했을 때 비로소 의자 캠페인은 현실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서비스노동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을 바꾸는 운동을 하게 될 것이다. 공부를 못해서, 가난하니까, 기술이 없으니까 이렇게 노동해도 되고 그렇게 노동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시각이 우리사회에 팽배하다. 이 노동자들은 하루종일 서서 일할 수밖에 없고, 위험한 물질을 먹을 수밖에 없고, 단순반복 작업으로 골병에 들 수밖에 없다고 사회가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리 노동자들에게 큰 위험이다. 취약노동자에 대한 사회의 시각을 바꾸고 노동을 존중하게 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중요한 운동영역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정리하자면 취약노동자의 건강권을 보호하기 위해 중요한 과제가 세 가지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우선 조직화로 권리실현의 주체를 형성하고, 법과 제도에 정해진 권리를 현실화하며, 노동자 존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제를 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서비스 여성노동자와 함께 한 지난 1년 반의 시간은 얼핏 답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민주노총과 서비스연맹의 동지들, 그리고 자문단의 여러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 ‘서서 일하는 서비스여성노동자에게 의자를’ 캠페인 추진일지
-
-
2006년 8월10일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위원회 제2차 회의에서 취약분과와 건설분과를 노동안전보건위원회 산하에 만들기로 결의. 취약분과는 비정규·여성·이주·영세사업장 노동자의 건강권 보호를 위한 단위
2006년 12월19일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위원회 제4차 회의에서 취약분과 건설과 관련한 방침 결정(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를 중심으로 모범사례를 만들어 취약분과 전체적으로 확산)
2006년 12월28일
취약분과 준비를 위한 회의 시작
2007년 6월5일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위원회 산하 취약분과·건설분과 발족 및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 안전보건 의제개발을 위한 조사연구사업 시작
2007년 11월14일
“서비스 비정규 노동자 현실과 과제” 세미나에서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 실태와 노동조합 대응전략 발표
2007년 11월28일
서비스연맹 임시대의원 대회에서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 건강권 교육
2007년 12월17일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 안전보건 의제개발 중간보고서 완성. 민주노총과 서비스연맹에 2008년 건강권 의제로 ‘서비스여성노동자에게 의자를’ 사업 제안
2007년 12월24일
서비스연맹 08년 사업계획 논의 ‘서비스여성노동자에게 의자를’ 사업 추진 결정
2008년 1월14일
서비스여성노동자 건강권 사업을 위한 기획단 구성 및 첫 회의
2008년 2월13일
‘서비스여성노동자에게 의자를’ 사업을 위한 백화점 여성노동자 근로실태조사 계획 확정
2008년 2월28일
서비스연맹 정기대의원 대회에서 사업 계획 승인
2008년 3월10일
백화점 화장품 판매직 여성을 중심으로 한 근로실태조사 시작
2008년 3월19일 '서서일하는 여성노동자에게 의자를' 캠페인 기자회견
2008년 5월 백화점 화장품 판매직 여성의 근로실태조사 완료
2008년 6월18일 캠페인단 준비 워크숍
2008년 7월22일 ‘서서 일하는 서비스여성노동자에게 의자를’ 국민캠페인단 발족 기자회견
-
- ©매일노동뉴스
- 기사입력: 2008-07-22 05:12:29
- 최종편집: 2008-07-23 10:09:20
컨텐트 링크
민중의소리를 후원하시려면 아래 링크를 클릭하십시오.
- 컨텐트 링크를 불러오고 있습니다...




© Copyright 2000~2008